窓_

안해용 목사님 사임 예배 단상

Soli_ 2013. 11. 25. 01:23

안해용 목사님 사임 예배 단상_

2013년 11월 24일_



작별의 서사는 늘 애달프다. 아이들은 엄마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불안은 천진했으나, 아내의 슬픔을 쉬이 관조할 수 없는 나의 불안은 불온했다. 슬픔에도 수백 가지의 이유와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없어 체념했다. 쉬이 타자를 신뢰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있어 아내와 나는 닮았지만 그 이유는 사뭇 달랐다. 아내는 경험과 상처에 기인했고, 나는 이성적 판단이 앞섰다. 군중 속에서 아내는 두려움에 불편하다면, 나는 불편함을 두려워하는 편이다. 그런 까닭에 아내의 사람들은 소수였으나 그들에 대한 애달픔은 깊고 맑았고, 나의 사람들도 소수였으나 그들과의 관계도 늘 위태로운 경계 즈음에 존재했다. 


3년 전 즈음, 너머서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우린 어느 교회에도 적응하지 못한 채 여러 교회를 서성였다. 애초 우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세운 명분은 꽤나 수려했다. 건강한 신학과 논리, 교회개혁, 목회자의 성품, 성도들의 품위, 예배 분위기, 동네교회, 아이들에 대한 친절함, 아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수려했으나 결국 '다시' 떠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지쳐갈 즈음, 너머서교회를 선택했다. 초등학교의 5층 시청각실을 빌려 예배드리는 개혁교회. 목회자는 임기제였고, 교회 운영은 평신도가 주도했고, 작은교회를 지향하여 예배당을 갖지 않았고, '모든 차별을 넘어 차이를 인정한다'고 했으며, '무려' 아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추구했다. 교회를 찾기 전, 홈페이지에서 본 교회의 정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예배를 드린 날 놀란 건, 다음 세가지였다. 첫째,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린다고 했으나 정작 당시 예지 또래의 아이들은 없었다. 모두 의젓한 초등학생 이상 아이들만 있었다. 우리 또래의 삼십 대 가정이 없었다. 40대 중반의 목사님 가정이 우리 바로 위였다(어르신들 교회!) 둘째, 사모님이 없었다. 목사님의 아내분은 스스로를 '집사'라고 소개했다. 셋째, 예지가 목사님과 집사님, 그리고 그들의 딸 이삭에게 스스럼 없이 안겼다. 예지는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다. 정말이지 아무에게도 가지 않던 아이였는데, 그들은 예외였다. 교회엔 멘토제가 있다. 일년간 각 가정 아이들의 멘토를 제비뽑기로 선정하는데, 예지는 목사님과 집사님께만 간다는 이유로 그들은 예지의 '당연직' 멘토가 되었다.


아내는 친정을 얻은 것 같았다. 친정 엄마나 언니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집사님께는 쏟아냈다. 아내는 종종 목사님이나 집사님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지는 점점 왈가닥 소녀로 자랐다. 네 살 예지와 일곱 살 예지는 전혀 다르다. 이삭 언니의 살뜰한 섬김 덕분이다. 우리는 예지가 이삭이처럼 자라길 소원한다. 나는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좋았다. 아프고 속상하고 절실했다. 설교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교회를 향한 그 안타까움이 느껴질 즈음엔, 목사님이 곧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강정마을 송강호 박사님의 책을 만들 때, 목사님과 집사님은 큰 힘이 되어주셨다. 10년 다녔던 직장을 그만둔 직후, 목사님과 만났던 어느 카페에서 서럽게 울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서글픔이었는데, 난 무너졌고 그는 추스렸다. 그날 이후, 목사님을 '선배'로 갈음했다. '멘토'라는 단어를 지독히 불신하지만(그래서 난 교회의 '멘토제도'에 대해서도 불만이 제법 많다), 만약 우리에게도 멘토가 있다면, 목사님, 집사님, 이삭이는 나와 아내, 예지와 예서의 멘토였다. 


목사님은 여름이 시작할 무렵, 교회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두 번째 3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안해용의 너머서교회'에 대한 문제 제기였고, 새로운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 이유였다. 교회는 혼란에 빠졌고, 어떤 성도들은 분노했고, 어떤 성도들은 성급한 불안과 슬픔을 토로했다. '목회자를 의존하지 않는 건강한 교회'는 안해용 목사님이 부재할 때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민주적 교회 운영만으로 교회에 주어진 파토스적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가'란 질문이었다. 그러나 내 질문은 파편적이고 소심했으므로, 새로운 목사 청빙 절차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고 '모범적' 사례를 남기며 완성되었다. 그리고 오늘, 안해용 목사님의 사임 예배까지 이어졌다. 나는 다시 걱정이다. 안해용 목사님, 이명희 집사님, 이삭이가 없는 너머서교회에 잘 다닐 수 있을까. 마치 너머서교회의 정관을 확인하고, 교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던 그때의 심정이다. 낯설고 두렵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가슴 벅찬 감격의 순간도 있지만, 수치를 감당하거나 슬픔이 압도할 때가 더 많다. 교회는 더 이상 시대의 희망이 되지 못한 채, 저잣거리에서 값싼 능욕을 감당해야 하는 처치로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라는 압도적인 확신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잡지에 기고한 서평의 서두에 쓴 글이다. '그리스도인을 산다는 것',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두 번째 이유는 사실 또 있다. 진리에 대한 압도적 확신과 더불어, '한 길 가는 순례'의 벗들 때문이다. 오늘, 안해용 목사님은 설교 중에 "우리 헤어지더라도 믿음의 도반(道伴)이 되자"고 했으니, 작별의 서글픔은 그만 잊기로 하자. 부디, 가시는 그 길, 평안하시길 빈다.  








예서는 너머서교회에서 태어났다. 예서가 돌도 되기 전에 아파서 입원했을 때, 난 마침 지방출장 중이었는데 목사님이 우리 가정을 살뜰히 보살펴 주셨다. 예서의 첫돌에 맞춰 교회는 유아세례를 주었는데, 너머서교회의 첫 번째 유아세례였고 마치 분위기가 돌잔치 같았다. 예서는 종종 강대상에 돌진하여 목사님께 다가섰는데, 그때마다 목사님은 예서를 반겼고, 그 손을 잡아주었고, 우리 부모들을 안심시켰다. 목사님은 늘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며 친구가 되었다.

(위의 왼쪽 사진, 아래 사진은 정용인 집사님이 찍으신 사진)

  


예서는 성찬식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달려갔다. 그곳에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최근 너머서교회의 두 번째 유아세례가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며 예서 세례받던 날이 생각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기도하던 목사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홀트교회에서 안해용 목사님은 성도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설교했다. 




목사님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제일 많았다. 아이들과 놀아 주지 않고, 함께 놀기. 그것이 비결이었다. 



이삭 연주회. 함께할 수 있어 기뻤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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