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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오마이뉴스, 130422)

Soli_ 2013. 4. 22. 12:42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서평]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송태욱 옮김|자음과모음|2012)


밤은 '열정적 고독'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고독은 반드시 가슴속 깊은 열망에 닿아야 한다. 고독을 담보한 혁명은, 허튼 교만을 전복시키는 처절한 성찰이자 진리에 대한 곧은 결기다. 책 읽기는 열정적 고독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부제는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다.

책 읽기는 곧 혁명의 역사다

일본의 니체로 주목받는 철학계의 신성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제목부터 섬뜩하고 도발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차용한 것으로, 언뜻 느껴지는 첫 인상과 달리 이 제목의 본의는 '전진'에 있다. 손의 절연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세상에 안주할 수 없다는 굳은 결의의 은유다.


폭력적 혁명 이전에 텍스트가 있었으며, 혁명의 근본은 읽기에서 비롯되었다.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읽기가 곧 혁명이 된 역사적 사례로 루터와 무함마드, 그리고 12세기의 '해석자 혁명'을 제시한다.

농민의 아들이었던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으며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세상의 지배 권력에 맞선 새로운 변혁의 중심이 되었다. 동굴에서 기도하던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대천사는 읽으라고 명령하고, 문맹이었던 그는 기어코 읽음으로 <코란>은 탄생하였다.

12세기 '해석자 혁명'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발견되고, 600년 가까이 묻혀있던 로마법을 교회법으로 새롭게 고쳐 쓰는 과정을 통해, 그라티우스 교령집이 완성되었다. 중세 해석자들은 세례, 교육, 혼인, 성범죄, 고아와 과부의 사회적 약자 보호 등에 대한 '삶의 규칙'을 세웠다. 이를 기반으로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교회가 세워지고, 이는 곧 근대 과학의 기틀이 되고 근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는 이유

그는 읽으라는 말을 듣고 읽었고, 쓰라는 말을 듣고 썼으며, 그리고 시를 읊은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본문 139쪽)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곧 혁명의 근원이다. 여기에서 문학은 어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의미있는 텍스트를 읽고, 글을 쓰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문학이며, 혁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해석하며 고쳐 읽는다는 것이며,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다시 쓴다는 것이다.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처럼 혁명은 읽고 쓰고 변혁시키는 것이다.

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읽음으로써 독자는 더 이상 이전의 삶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이제껏 내 삶의 허위에 격렬히 도전한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며,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를 묻고 시험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책 읽기가 혁명이 되지는 않는다. 치열한 책 읽기가 꺾을 첫 번째 대상은 언제나 내 자신이다. 저자는 '책을 읽고 말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과감히 그것에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학문에 종사하는 숱한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로만 배설하는 '교양인'으로 전락했지만, 저자는 니체를 통해 그 모순을 극복한다. 텍스트로 하여금 내 무지를 드러내어 먼저 내 삶을 변혁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본문 34쪽)

책 읽는 시간은 늘 시작이다


독서 인구는 점점 줄고 있으며 노령화 되고 있다는 최근의 통계는 이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한국방송(KBS)과 한국어진흥원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도서 40권을 출제 범위로 선정하여 시험과 경쟁을 통해 독서왕을 선정하겠다는 <KBS 어린이 독서왕>이란 '무식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란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냐마는, 어떤 상업적 이권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어찌 이런 프로그램인지 가능한 지 모르겠다. 나는 종종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이 없었다면 좀더 훌륭한 문학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런 서글픔이 압도하는 요즘, 4월 23일은 무려 "책의 날"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단호한 문장으로 '문학의 종말'을 촉발하는 이들에게 일갈한다. 문학이 끝났다는 주장은 도스또옙스키, 톨스토이 등의 위대한 이름에 대한 모욕이라고. 문학은 스스로 혁명가로 자처하되, 텍스트의 한 행이라도 놓치지 않고 치열하게 읽고 다시 쓰며 삶을 바꿔가는 독자들에게로 그 당위를 계승한다.

당연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본문 251쪽)

그리고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며 책 읽는 벗을 위로한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라고. 그러니 '용기를 잃으면 안 된다고,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고 말이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밤에 시작한 책은, 어느덧 닷새 째 밤에 이르렀다. 초초했던 저자의 고독은 어느새 새로운 희망을 가늠한다. 책 읽는 시간은, 늘 그렇게 시작이다.

자, 마지막 밤도 깊은 것 같습니다. 이제 별들도 반짝이고 여름이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밤은 없습니다. 밤은 늘 시작입니다.(본문 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