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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했던 그리움을, 이제 '타자'에게 허락하자고 (오마이뉴스, 130416)

Soli_ 2013. 4. 16. 03:00

오마이뉴스에 22번째로 기고한 글이며, "당신을 한번쯤 웃게 해주고 싶었어요"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나'를 향했던 그리움을, 이제 '타자'에게 허락하자고
[서평] 신경숙의 <외딴방>, 그리고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신경숙은 어느날 무심히 올려본 말간 밤하늘에 둥그렇게 뜬 달을 보았다. 어떤 날은 보름달이고, 어떤 날은 초생달이고, 어떤 날은 구름에 뒤처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달이 보기에 '나'는 티끌 같은 존재이겠으나, 달은 '나'를 콕 집어 말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따뜻하고 명랑한 '달의 말'처럼, 작가는 독자에게 편지 같은 짧은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내게, 당신이란 존재는 언젠가 내가 읽었던 아픈 책을 같이 읽은 사람이다. 그 사람을 나는 당신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이미 읽은 어떤 책은 앞으로 내가 읽을 것이다. 달에게 먼저 전해진 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이 가능하면 당신을 한번쯤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봄날 방을 구하러 다니거나 이력서를 고쳐쓸 때, 나 혼자구나 생각되거나 뜻밖의 일들이 당신의 마음을 휘저어놓을 때, 무엇보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 자책이나 겨우 여기까지? 인가 싶은 체념이 당신의 한순간에 밀려들 때, 이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달빛처럼 스며들어 당신을 반짝이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본문 210쪽, 작가의 말)

<외딴방>, 그리고 나의 이야기

1979년 4월 3일, 아버지는 암으로 소천(召天)하셨다. 그즈음 집에는 친척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어머니는 종종 소리 내어 우는 누나를 달래곤 하셨다. 난 아버지의 냄새가, 가래 끓는 소리로 탁하게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싫었다. 담배 냄새 절은 삼촌들이 얼굴을 비비대는 것도 싫었다. 

집 앞 골목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다. 난 뭔지 모를 해방감에 잠시 기뻤던 것 같다. '아, 무서운 아버지께 불려가 그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구나', '저 친척들도 이제 우리 집을 떠나겠구나' 생각했다. 주정하던 삼촌들 몰래 실실 웃기도 했던 것 같다. 훗날 지독한 가난을 만날 때마다, 거친 노동에 지친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밤새 들을 때마다, 그때 내가 버릇없이 웃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래서 우리 가족이 벌받는 것이라고 자책했다.

아무튼 난, '두려움'이란 것을 그때 처음 만났다. 어머니의 곡소리,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힘겨워 하던 두 살 터울 형의 슬픈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낯선 두려움이다. 비포장 도로를 두어 시간 달려 장지에 도달하기까지, 난 몇 번 토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기까지 그렇게 멀미를 했다. 멀미는 아득한 슬픔에 관한 하나의 표징이었다.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마다 그 막막한 슬픔을 생각했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차를 타면 언제나 잠을 서둘러 청했다.

오늘 추도예배를 드리러 천안을 오가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정 넘어 도착하여 곤히 잠든 딸 예지를 안아 옮기면서 그때의 시간들을 복기한다. 스치듯 재연되는 회색빛 골목, 우리집 담장 밑으로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난 아침마다 일어나 그 민들레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마치 내 딸 예지가 그러는 것처럼. 그런데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그 민들레는 잊기로 했다. 잊기로 했던 그때의 다짐이 생각났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 역시,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첫째딸 예지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겪은, 내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고달팠던 청소년 시절을 지나 스무 살 언저리에 입대한 군대에서 저녁마다, 신경숙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그의 소설 <외딴방>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겨울에 시작하여 여름이 시작될 즈음, 필사를 마쳤다. 열여섯에서 스물까지 문학을 꿈꾸며 독한 가난과 속절없는 패배를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던 <외딴방>의 주인공 '나'는, 작가 신경숙이 아닌 독자인 나의 현현(顯現)으로서 유효했다. 작가는 내게 절망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자 소명이라고 다독였다.

신경숙은 "그리움이란 멀리있는 너를 찾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너를 찾는 일이다. 너를, 너와의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 내 가슴을 찢는 일이다"라고 썼다. 꿈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을 찢는 그리움 같은 것이다. 어떤 꿈은 필사적이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해, 살기 위해 품는 꿈이 있는 법이다. 어떤 꿈은 위태롭게도, 숱한 절망과 동거한다. 통쾌한 승리는 사실, 이 세상에서 거의 만나기 힘든 로또복권의 행운에 가깝다. 

스물여섯 편의 반짝이는 위로


나는 신경숙을 통해, 내 오랜 꿈, 혹은 오랜 절망과 마주했던 것 같다. 드문드문 발표되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걷던 길을 멈추고 서성이다 결국 주저 앉곤 했다. 그것은 마치 고해성사와도 비슷했다. 가슴속 깊이 숨겨 놓았던 내 자신을 꺼내 놓는 일이었다. 아버지 추도예배를 다녀온 날, 늦은 밤부터 신경숙의 신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 단편은, 이전 소설과는 좀 다르다. 고독한 나를 토닥토닥 다독인다. 그것도 살갑게. 

걷다보면 지금보다는 지난 일들이 투명하게 되비쳐오는 때가 잦아 나도 모르게 깊은숨을 쉬곤 하지. 바람은 거울인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그걸 이겨내고 이 시간으로 오게 되었을까 싶은 일도 그냥 담담하게 떠오르곤 해.(본문 189쪽) 

스물여섯 단편들은 각기 다른 소재로 반짝인다. 간혹 똑같은 주인공이 그 뒷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하지만, 스물여섯의 서사는 어쩌면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그 평범한 일상스러움 때문일까. 어떤 이야기라도, 내가 그 틈에 끼어 화자가 되고 '고양이 남자'나 'N'이나 'P'의 친구가 되는 일 즈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자연스럽다. 

타자에 대한 시선은 내내 그 따뜻함을 유지한 채 말을 건넨다. 철없는 젊은 목사와 성깔있는 스님 간의 싸움 와중에도,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길고양이들에게도, 고양이들의 먹이를 앗아가는 까치들에게도, '재수생 선'에게도, 시골에서 아침마다 전화하시던 엄마에게도, 심지어 담벼락을 넘다 걸린 도둑님에게 건넨 시선마저도, 그 온기는 여전히 따습다.

신경숙은 자신과 지금껏 동행했던 독자를 '당신'이라 부르며, 이젠 오래도록 외롭던 그들의 슬픔을 달래고 있는 듯 보인다. 아득한 먼 옛날 들었던 '너 참 예쁘다'란 칭찬을 문득 추억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누나를 가로챈 동기 녀석의 질투를 이해하게 만들고, 밥벌이에 쫓겨 소홀했던 늙은 어머니의 외로움에 다가서는 법을 슬며시 알려 준다. 

그런가 하면, 평생 돈과 명예를 위해 쉴틈없이 달렸던 한 노인에게 다가온 아득한 회한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묻게 만든다. 지금 잘 살고 있냐고, 정말 그러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화가가 되고 싶은 '재수생 선'에게 고흐의 말을 빌어 이렇게 당부한다.  

네가 미래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네가 고통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한 것들은 저절로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고 쓸모 있는 것이 될 거야. 그걸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미래에 네가 그리는 그림이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게, 쓸모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본문 31쪽)

이제 타자에게 나의 그리움을 허락하자고

아버지의 기일을 맞이할 때면, 늘 오랜 죄책에 시달리며 절망을 떠올리곤 했다. 투쟁하듯 일 속에 매몰되었던 삼십 대를 지나고, 불현듯 주어진 공백 같은 시간들을 마주하며 당혹해 하고 있다. 어떤 선배가 "인생의 숙명이 죽음이듯이, 직장인의 숙명은 퇴사"라고 하였다. 숙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막다른 곳에 이른 숙명은 새로운 운명을 모색한다. 꿈은 절망과 동거한다. 다시, 또 그렇게.

그즈음, 신경숙은 나에게 타자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난 '재수생 선'처럼, 그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다. 심각한 표정으로 인생의 고단함과 세상의 거대한 음모를 슬쩍슬쩍 내비치던 나의 서사들이, 그 앞에서 허물어진다. 어떤 담론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너른 품속에서 공격과 방어의 패턴을 잃고 일탈한 까닭이다. 무너진 나는, 그저 그 품에서 위로받고, 또다른 타자에게 시선을 향한다.  

타자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뜻밖에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해.(본문 20쪽)

이름도 없이, 물질적인 풍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그러나 열 손가락을 움직여 끊임없이 물질을 만들어내야 했던 그들을 이제야 내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나의 내부에 퍼뜨린 사회적 의지를 잊지 않으리. 나의 본질을 낳아준 어머니와 같이, 익명의 그들이 나의 내부의 한켠을 낳아주었음을... 그래서 나 또한 나의 말을 통하여 그들의 의젓한 자리를 세상에 새로이 낳아주어야 함을...(<외딴방>, 419쪽)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껏 신경숙의 소설과는 사뭇 다른 곡조이나, 결국 작가는 같은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나'를 향했던 그리움을, 이제 '타자'에게 허락하자고. 그것이 나의 인생을, 우리의 세상을 반짝이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