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의 습격에 관한 소고
<관능적인 삶>(이서희 지음|그책 펴냄|2013년 11월)
시인 김소연은 '근거를 찾아 나선 상태'를 "홀림"으로, '근거를 아직 찾지 못해 불안정한 상태'를 "반하다"로, '근거들의 수집이 충분히 진행된 상태'를 "매혹"으로 정의한다(<마음사전>, 123쪽). 그렇다면, 이 책에 대한 매혹은 합당하다. 감각을 한껏 자극하는 미려한 문장들이 그 첫째 이유다. 문장들에 스민 삶의 서사는 독자의 가슴을 도발하여 흔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요동친 존재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체득한다. 이른바 '관능'의 습격이다.
미셀 푸코는 성(Sex) 문제를 사회적 권력의 지배 관계로 고찰한다. 지배 권력은 '합법과 비합법, 허용과 금지'의 통치 기제로 성을 통치하려 한다. 성은 근원적 욕망의 문제인 까닭에, 사회적 통제(혹은 억압)의 수단으로도 매우 효율적이다. 성과 금기의 역사는 지배 권력과 그에 대한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푸코가 성에 대한 사회학적 맥락을 비평하고 있다면,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을 시도한다. 바타유는 에로티즘을 "단순한 성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정신적 요구이자 죽음조차 긍정하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존재와 존재는 서로를 타자로 인식하고 수용하고 거부한다. 존재간의 단절은 필연적이고, 불연속적이다. 따라서 에로티즘은 '잃어버린 연속성에 대한 향수'이다.
'기필한 절망'에서 '기필한 매혹'으로 비상하는 관능의 서사
서두가 길었다. 이서희의 책 <관능적인 삶>은 페이스북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등장했다. 'Sophie Ville'라는 필명으로 일기를 쓰듯 기록한 관능의 서사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서사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관능의 연대기를 이뤄낸다. 이서희의 에로티즘은 우선 바타유의 사유를 충족한다. 그녀의 관능은 억눌린 존재의 저항과 해방 서사인 동시에, 닿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필사적인 열망인 까닭이다.
'관능'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표준국어대사전). 첫째,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 둘째, 오관 및 감각 기관의 작용. 셋쩨, 육체적 쾌감, 특히 성적 감각을 자극하는 작용. 첫째 의미가 관능의 본질이라면, 셋째 의미는 오늘날 일상에서 통용되는 맥락을 적극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관능은, 국어사전적 의미를 거슬러 반추한다. 즉, 아슬아슬한 성적 감각의 충만한 자극에서 출발하되 결연히 존재하는 생명의 지극한 본질까지 전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맞이한 아침, 그는 회사로 출근하고 홀로 남은 '그의 방'에서 '세수도 하지 않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그의 책과 놀았다'. 이렇게 부연한다.
"읽지 않은 그의 책만큼 요염한 것은 없었고, 나는 그의 책을 유혹하듯 펼치고 열고 더듬고 따라갔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세상에는 포르노그래피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이미 이곳은 지독히 관능적이고 불순하고 관음적인 시선으로 넘쳐나는데, 이토록 은밀하고 매혹투성인 세상에서 그 이상의 터치는 조금도 관능적으로 보이지가 않는 걸."(24쪽)
그녀의 관능에 매혹당하는 순간은 '침대'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 여인의 풍경 속에서, 그녀가 탐하는 그의 책에 대한 은밀한 열망을 목격할 때이다. 아슬했던 시선이 당도한 매혹의 순간이다. 그녀는 '당신의 글자 페티시즘'에 대해 고백한다. 체취 어린 글씨야말로 어떤 존재에 대한 강력한 욕망을 추동한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마시라. 그녀는 사랑, 연애, 키스, 섹스를 한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다만, 그것으로 인해, 존재의 끈질기고도 가열찬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뿐이다. 사랑은 '황홀한 절망'일 것이나, '기필한 절망'은 기어코 '기필한 매혹'으로 비상할 것이다. 연애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며, 결과가 아닌 그 과정에 전부를 거는 것이다. 따라서 연인과의 은밀한 밤을 묘사하는 농밀한 문장과 관능적인 서사들은 필연적이다.
그녀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족이란 이름의 억압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서울대 법대로 상징되는 소수 엘리트의 허위를 떨쳐버린 그녀는, 프랑스 파리로 떠나 영화를 공부했으나 그것은 핑계였을 것이다(어찌 학문 따위가 관능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사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여럿이나, 그녀는 그들 모두와 각각의 시공간에서 각기 다른 빛깔의 사랑을 이룬다. 탐험하듯 닿은 그란 존재는, 그녀에게 개별적인 추억으로 간직된다.
"지금도 생각한다. 관계의 황홀경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을 때 찾아왔다가 그 사랑을 지속하기로 선택한 순간에 지극해진다. 존재의 연루가 관계의 단단함으로 이어지는 자리. 그곳은 인연의 결말이 어떠하든 눈부시다."(46쪽)
'일탈과 저항의 관능'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관능'으로
저자의 시선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마흔 즈음에 이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의 아른한 일상에 다다른다. 뜨겁게 질주했던 청춘의 관능을 회고하고 추억하는데, 불쑥 도드라진, 깊고 아득한 상처들과 조우한다. 골방 속에 갇혔던 그녀의 상처는 오랜 세월 고독했다. 그 상처들은 푸코가 직시했던, 억압된 성의 역사와 관련 있다. 아득한 슬픔에 대하여 그녀는 아우성치지 않았다. 다만,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는 일탈과 저항의 관능으로 결행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여기에서의 관능을 희망한다.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해한' 관능의 의미들도 있겠으나, 그것이 단지 추억일 뿐이라면 얼마나 허망할까. 하여, 그녀의 관능은 여전히 절박하다. 불행에는 겸허하되 행복에는 당당하다. 그녀 고유의 열정은 언제나 오늘 다시 시작한다. 관능의 문장은 필사적이고, 관능의 서사는 생동하며, 관능의 존재는 언제나 건재하다. 관능은, 존재하는 모든 이의 심장에 거친 호흡을 선사한다. 그녀의 관능에 매혹당한 나의 심장은 펄떡펄떡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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