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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박원순의 야심과 우리의 희망이 패배하지 않기를 (오마이뉴스, 130805)

Soli_ 2013. 8. 5. 18:51

오마이뉴스에 38번째로 기고한 글이며, "'겨우' 1년 6개월, 이런 정치인 처음 봅니다"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아렌트의 정치적 공공성에 대한 열망과 박원순의 야심이 부합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고, 아직 '1년 6개월' 밖에 되지 않았으니 좀 더 지켜 볼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분명한 건, 여지껏 봐왔던 정치인과 '정치인 박원순'은 다르다는 점이었지요. 오마이뉴스에서 글도 조금 읽기 좋게 편집하고 제목도 새로 달았는데, 그래서 박원순 시장에 대해 훨씬 더 호의적인 서평으로 읽혀진다는 점, 그 부분이 조금 불만입니다





부디, 박원순의 야심과 우리의 희망이 패배하지 않기를
[서평] 오연호가 묻고 박원순이 답하다 <정치의 즐거움>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철학자가 아닌 정치이론가로 불리길 바랐다. 철학자란 '단독자로서의 인간'에 초점을 맞추지만, 정치이론가는 '한 인간이 아닌, 지구에 살며 세계에 거주하는 인류'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에게 인간 삶의 조건이란, 타인과 함께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정치는 절대적 진리의 논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설득과 합의의 열린 공간이며, 정치란 그 열린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하여, 정치적 인간이 '후마니타스(인문학이란 개념은 라틴어 '후마니타스'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인간다움'이란 뜻을 가졌다)'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박원순의 행보를 지켜보며, 광폭의 시대 속에서 정치의 '공공성'을 뜨겁게 열망했던 아렌트가 생각나는 것은 우연일까. 아님, 희망의 전조일까. 

전태일, 조영래, 그리고 박원순

<정치의 즐거움>(박원순, 오연호 지음|오마이북 펴냄|2013년 7월)

'오연호가 묻다' 시리즈의 첫 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첫 출간 땐 시리즈 제목은 없었지만).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직전 진행된 인터뷰는, 그의 서거 직후에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로 출간돼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두 번째 인터뷰는 조국 교수였고 <진보집권플랜>으로 묶였다. 정권교체를 향한 조국의 구상은 담대했고, 희망이 가물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조국 현상'으로 설렜다. 세 번째 인터뷰는 법륜 스님으로 시대의 화두인 '통일'을 다뤘다. <새로운 100년>에서 법륜 스님은 통일한국 '100년의 미래'에서 '1000년의 꿈'까지 설파했다.

노무현의 마지막 인터뷰는 끝내 슬픔으로 남았고, 조국의 구상은 벅찼으나 결국 실패했고, 법륜의 꿈은 뜨거웠으나 여전히 아득하다. 지금도 숱한 격동의 찰나로 급변하는 이 땅 한반도에서, 그 모든 슬픔과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지, 묻고 싶다. 이번엔 박원순이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는 2012년 12월 말, 정권교체를 바랐던 48%의 사람들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때, 박원순을 찾았다. 이번 책의 제목은 <정치의 즐거움>이다. 

1992년 미국 대통령에 클린턴이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된 직후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권운동가였던 넬슨 만델라였다. 클린턴이 가장 존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선구자인 미국의 마틴 루터 킹(1928-1968)의 영향을 받았고, 루터 킹은 노예무역제도 철폐를 위해 20년간 투쟁했던 영국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의 영향을 받았다. 

박원순은 클린턴에서 윌버포스까지를 인용하며 "역사는 앞선 자들을 본받는 사숙(私淑)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나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박원순을 만든 이들은 누구일까. 박원순을 인권변호사로, 시민사회운동으로 이끈 이는 조영래(1947-1990) 변호사다. 그리고 조영래의 가슴에는, 전태일 열사의 뜨거운 죽음이 새겨져 있었다. 박원순의 회고 앞에 오연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태일 평전> 1부 중 한 장의 제목이 '서울에서의 패배'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로 일하고 분신한 곳이 청계천 평화시장 아닙니까? 조영래 변호사가 1970년에 <전태일 평전>을 쓸 때, 그의 눈에는 평화시장이 서울의 모든 문제점을 집약해놓은 곳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조영래의 후배 박원순이 '서울의 해결사' 역할을 하는 서울시장이 되어 있네요. 역사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61쪽) 


민주정부 10년 동안 시민사회 운동가들의 상당수가 정치권의 부름을 받았고, 박원순은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시민사회운동을 고집하며 버티던 박원순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피땀 흘려 일군 상식의 틀과 민주주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치의 후퇴는 곧 시대의 후퇴였다. 

고심하던 박원순은 49일간 백두대간 종주에 오른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고뇌와 번민의 나날들이었다. 속리산에서 비를 맞으며 종일 울며 걷던 2011년 8월 9일은 '인간 박원순이 정치인 박원순으로 진화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다음은 그날의 산중일기 중 한 대목이다. 

"내가 직접 보고, 만나고, 들었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돌며 애써 희망을 보려하였지만, 그리고 희망의 단서들을 발견하려고 했으나 이 삼천리강토는 아비규환이고 깊은 한숨으로 뒤덮여 있다. 애써 외면하고 또 외면하려고 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 한반도에 사는 모든 억울한 생령들의 눈물을 마주하고 말았다. (중략)

끝없이 쏟아진 폭우로 동료들 눈치를 보지 않고 그렇게 하루 종일 울었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한 내 자신의 역할과 운명에 대해서 묵상하고 또 묵상했다. '이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박원순, <희망을 걷다>; 박원순-오연호, <정치의 즐거움>, 85쪽에서 재인용)

'한반도에 사는 모든 억울한 생령들의 눈물'을 마주한 박원순은 울고 또 울었다. 희망의 단서를 찾고자 했으나, 삼천리 강토는 깊은 한숨으로 뒤덮여 있었다. '정치인 박원순'의 회심이 움트는 순간이다. 그날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그만둔다고 말하기 전이었다. 2011년 8월 28일, 종주 41일째 날에 박원순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지지율 50%의 안철수가 지지율 5%의 박원순을 지지하고, 지난한 선거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울시장에 당선된다. 

박원순의 1년 6개월, 이미 실현된 희망의 단초들

박원순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유로' 절망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너무나도 할 일이 많은 지금은 절망도 사치'인 까닭이다. 그리고 정치가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지난 1년 6개월 간의 시정을 통해 입증하고자 했다. 오연호가 묻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 '희망의 출처'였다. 이 책엔 앞으로 실현될 꿈이 아니라, 이미 실현된 희망의 단초로 그득하다. 

뉴타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취임 후 첫 3개월을 마치 3년처럼 일하여 '뉴타운 출구 전략'을 마련하였다. 뉴타운을 통해 주민들이 한몫 잡겠다는 투기적 발상을 하게 된 것은, 그 본질을 모른 채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뉴타운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민의 70~80%는 쫓겨난다. 하지만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이 장미빛 공약으로 내걸고, 건설업자들이 황금알을 낳는다고 유혹했다. 박원순의 서울시는 뉴타운 지역의 정확한 실태조사를 진행하여, 주민들에게 뉴타운 정책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박원순은 이를 '작은 치유'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실태 조사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동안 뉴타운 추진 과정이나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해드리는 작은 치유입니다. (중략) 반대자가 상당히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동의 없이 사업이 추진된 것 자체가 폭력이에요. 또 설사 동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기적인 수법이 농후했어요. 건설회사들이 OS(경호경비용역)를 동원해 주민들을 꼬드겨 동의를 받아오게 했거든요.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서울시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중략) 이런 나라는 거의 없어요. 후진국의 상징이죠. 수도 서울에서 생명까지 앗아간 용산참사가 일어났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146-147쪽)


그 밖에도 박원순은 보도블록 개혁을 통해 서울시 행정의 원칙과 철학, 태도를 혁신하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공동체를 복원하고자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시작하고, 2012년에 1133명, 2013년에 6231명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2013년 안에 협동조합 지원을 통한 25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한다. 서울시립대학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였고, '원전 하나 줄이기' 사업을 통해 기후변화세계시장협의회(WMCCC) 의장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전수조사를 통한 노숙자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고, 최소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복지기준인 '서울시민복지기준선'의 발표 및 보건지소의 확충 등을 실현하고 있다. 

고건 시장 시절 6조원이었던 서울시 부채는 이명박, 오세훈 시장을 거치면서 20조로 불어났다. 하루 이자만 20억 원이다. 박원순은 복지 재정을 확대하면서도 부채를 1조 가량 줄였다. 한강르네상스 사업, 한강 공공성 회복 프로젝트 등을 추진하던 당시 서울시는, 이를 통해 한강이 서울의 랜드마크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원순의 생각은 다르다. 박원순은 이미 서울에는 랜드마크가 많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북한산. 둘째, 조선의 수도였던 600년, 한성백제의 수도였던 500년의 역사. 셋째, 사람, 바로 서울시민들이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멀리 가지 마라, 우리 안에 어머어마한 재산이 있다! 랜드마크 세우지 마라, 우리 안에 랜드마크가 있다!"(224쪽)

'박원순의 야심', 우려와 희망


박원순은 '하늘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체화했고, '전태일과 조영래의 꿈'에 평생을 걸었고, 자신이 가는 길이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하며, 시대의 화두를 둘러싼 경쟁이 정치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박원순의 정치 핵심은 "소통과 참여, 거버넌스(Governance, 공공경영)"에 있다. 69만의 트위터 팔로워와 직접 소통하고, 정보 공개와 모든 시정에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무엇보다 반대자들과의 적극적인 대화와 설득을 통해 거버넌스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그의 '정치적 야심'은 사람에게 닿아 있다. 오연호는 '박원순'적 맥락에서 '야심(野心)'을 "거친 들판에서 실천하며 대안을 만들어낸다"의 의미로 해석했다. 

서두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인간 삶의 조건과 후마니타스적 가치를 실현하는 정치의 꿈은, 대부분 박원순의 정치적 야심 속에 충족된다. 물론 이제 겨우 1년 6개월 지났을 뿐이므로, 보다 냉철히 그의 행보를 지켜 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렌트의 텍스트가 실현되는 우리 시대의 정황은, 처음 만난 정치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런 정치인은 내 평생 처음이었으니까. 

오연호가 묻고 박원순이 답했다. 하지만 박원순은 이렇게 고쳐 말한다. 박원순이 묻고 서울시민이 답한 거라고. 그렇다면 애초 오연호가 묻던 희망의 출처는, 이제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부디, 그의 야심과 우리의 희망이 패배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