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서평에서 빠진 부분
"이런 동맹도 좋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 우선이야. 그 위대한 사상 때문에 우리 같이 힘 없는 사람들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잖아. 그러니깐 그 신발이 있든 없든, 진짜 부적은 바로 우리의 정신과 이 신조 속에 있어.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57쪽)
주인공 안토니오와 더불어 '납탄동맹'이라는 아나키스트 연대를 이루던 날 나누던 대화다. 여기에서 '신발'은 전설적인 아나키스트로 스페인 공화정 시대를 이끌었던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의 신발을 말한다. 안토니오의 친구 중 하나가 '두루티의 신발'을 득템하여 나중에 안토니오에게 선물한다. '두루티의 신발'은 아나키스트적 열망을 향한 어떤 승리의 의식과도 같다.
두루티는, 내 기억이 맞다면, 스페인 내전이 시작될 즈음 생을 마감한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프랑코 쿠데타 세력의 장기집권은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루티는 아나키스트로서 절정의 순간에 죽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어떤 상징과도 같다.
두루티와 대비되는 안토니오의 아나키스트적 생애는 패배와 변절을 반복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 '비상하는 죽음'으로 저항했을 뿐이다. 난 두루티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그가 과연 끝까지 아나키스트로 살 수 있었을까? 패배하지는 않았을까? 아님, 승리를 쟁취한 이후 변절하지는 않았을까? 속단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절정의 순간에 죽었으므로 아나키스트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은 불의한 시대적 정황 가운데 발현된다. 자유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시대에 자유와 정의를 갈망하는 이들로 인해 불꽃처럼 일어난다. 허나 세계사의 주요 변곡점에서 그들은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결코 성공적인 역사를 이루진 못했다. 패배하거나 변절하거나 사라진다. 아나키즘의 실현은 아득하다.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문제 앞에, 가족과 국가라는 안위 앞에 높고 순수한 이상은 버텨내기 쉽지 않다.
그리고 하나 더 언급하자면, 안토니오를 비롯한 아나키스트가 명명한 주적들로 기독교가 손꼽히는 현실이 안타깝다(이는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실이다). 부르조아, 기득권, 지배세력과 결탁한 주류 기독교는, 사실 우리의 이야기다. 난 아나키즘과 기독교의 디아스포라적 영성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기독교는 아나키즘의 실현을 적극적으로 도모한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나의 안타까움이자 희망이었다.
1) 이상, 서평에서 빠진 대목. 너무 깊이 들어가는 데다가, 기독교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서평이 아니므로 뺐다.
2) 부에나벤라 두루티의 생애를 다룬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실천문학사)이란 책이 있다. 아마 한국어판 제목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이 책에서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찾아보니 절판인데, 이 책도 다시 살아나 같이 읽혔으면 좋겠다.'기고_ > 오마이뉴스_'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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