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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딸아이와 읽는 평화, 평화그림책 (오마이뉴스, 130301)

Soli_ 2013. 3. 1. 15:00

오마이뉴스에 12번째로 기고한 글이며, "3.1절, 아이보다 어른이 읽어야 할 그림책"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3.1절에 딸아이와 읽는 평화, 평화그림책

「평화란 어떤 걸까?」(하마다 게이코 글·그림|박종진 옮김|사계절, 2011)




한참 세상을 알아가는 호기심 많은 일곱살 예지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물어봅니다. 유치원에도 가지 않고 거리엔 태극기가 걸려있고 텔레비전에선 대통령님이 참석하는 기념식을 중계하는 오늘은 3·1절입니다. 


"일본이란 나라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았고 힘으로 다스렸어. 그래서 어느날 참다못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지. 그날이 3.1절이야..." 


그러나 예지는 아직도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일본이 왜 그랬는지도 궁금하지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았는 건 우리 안에서도 흔한 일이 되었으니까요. 그저 일본은 나쁜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인데 다만 힘이 없었을 뿐이라고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나쁜 일본에 맞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지만, 이 대한민국 안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은 무얼 외쳐야 하는지 설명하기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꺼냈습니다. 일본 작가 하마다 게이코의 그림책 <평화란 어떤 걸까?>입니다. 


3·1절, 다시 평화를 생각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한 역사적 맥락과 지정학적 이유가 있겠지요. 우리나라가 그리 힘없이 나라를 빼았긴 것도, 단지 나쁜 나라 일본을 만나서는 아니겠지요.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우리나라가 일본처럼 힘있는 나라였을 때 대륙을 지배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륙에 있던 나라의 후예들은, 한반도의 저 나라에게 나라를 빼았겼다고 회상할 테죠. 우리는 비록 한때지만, 그때를 자랑스런 역사로 간직할 테죠. 

이 평화그림책은 '우리 어린이들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국·중국· 일본 세 나라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함께 기획한' 것입니다. 그 시리즈 중 세 번째로, 이 책은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평화란 무엇인지를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다소 무시무시합니다. 검정색 비행기가 검푸른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하늘 아래 공을 가지고 뛰도는 아이들, 엄마의 손을 잡고 거니는 아이들, 할머니와 손자,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폭탄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고 한 아이가 타던 자전거가 뒹굴고 있습니다. 작가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않는 것" 그리고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평화라고 말합니다. 



무시무시한 그림이 지나면,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고 "왜냐면,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있는 권리, 그 최고의 행복을 지키는 것. 평화는 그런 겁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역사적 명분은 늘 그러하듯 권위적 언어로 기술되지만, 정작 그 명분은 우리의 평화를 빼았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누군가를 향한 폭력은, 피해자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평화도 앗아갑니다. 누군가를 짓밟고 누리는 평화는 결코 평화일 수 없으며,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행복은 더 이상 행복일 수 없습니다. 평화는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평화는 "배가 고프면 누구든 먹을 수 있고, 찬구들과 함께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평화는 이런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는 인정하고 차별은 넘어서는 것, 함께 살기 위하여 잘못했을 땐 사과할 줄 알아야 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에게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뜻하는 바를 힘껏 이루어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제주 4·3 항쟁, 그리고 제주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미군정 체제와 관리들의 행태에 불만을 품고 주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경찰은 시위하던 이들에게 발포하였고, 이를 계기로 시민들의 항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항거는 이듬해 4월 3일, 주민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집니다. 이른바 '제주 4·3 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민 25,000-30,000명, 군인 180명 내외, 경찰 140명의 전사자가 생겼습니다. 참혹한 비극이 제주도를 휩쓸었습니다. 

비극의 땅 제주도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지난한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정마을은 절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 투쟁은 계속됩니다. 강정에서 시작된 그 투쟁은, 기어코 제주도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들고자 하는 희망에 닿았습니다. 강주일 주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오늘, 제주도 관덕정에선 제2차 '제주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대회가 있었습니다. 관덕정은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의 항거가 시작된 곳입니다. 문정현 신부, 송강호 박사 등이 주도한 이 선언문에는 "관덕정에서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을 하는 이유는 선열들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며 "불의의 폭력에 맞선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고 정의가 수난 받는 개탄스런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들이 염원하는 평화는 아득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림책 이야기를 하지요. 작가는 "목숨은 한 사람에게 하나씩, 오직 하나뿐인 귀중한 목숨. 그러니까 절대 죽여서는 안 돼. 죽임을 당해도 안 돼. 무기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합니다. 무력으로 평화를 강제하는 해군기지는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평화는 공존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방법

평화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거하는 이곳에 자리잡은 공존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오늘, 3·1절을 맞아 나의 소중한 딸에게 이 책을 읽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이가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네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살아내길 희망합니다. 

어쩌면 이 그림책은 아이들이 아니라, 온갖 탐욕에 눈이 먼, 약자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는, 무력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도대체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른들이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