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오마이뉴스_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오마이뉴스, 130223)

Soli_ 2013. 2. 23. 17:15

★엊그제, 한 캠퍼스 선교단체로부터 독서 강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심 끝에 거절하였지요. 그러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이 글은 김예슬 선언_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에 대한 서평이기도 하지만, 만약 제가 강의 요청에 응했다면 그곳에서 전했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나의 청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마이뉴스에 8번째로 기고한 글이며, "대학에 입학할 그대,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대학에 입학할 그대,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십수 년 전 성경책 한 모퉁이에 적어 두었던 한 문장이 있다. '신앙, 혹은 신학은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발견이었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삶의 시작은 시대와 세상 속에 공고하게 자리잡은 위선과 불의와의 싸움과 다름 아니었다. 저항하지 아니하고는 나의 신앙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소명 이전에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던 까닭이다. 살아 남기 위한 절박함이었다. 

나를 좌절시킨 김예슬, 그의 선언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한 학기에 제법 많은 독서 강의를 다니고 있었다. 독법은 책을 정복하기 위한 병법 비슷한 것이었고, 때로 성공을 위한 어떤 전제였다. 그런 기대감으로 나를 불렀던 이들에게 내가 가장 먼저 선사할 것은 좌절이었다. 그 기대감을 좌절시켜야 비로소 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2010년 3월 11일, 조치원에 있는 한 캠퍼스에 저녁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급하게 끝내고 그날 있을 강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 직전, 인터넷을 열었을 때 문득 이 기사를 보았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김예슬 씨가 학벌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것이다. 감동적인 명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붙였다는 대자보의 명문을 보며 아슬하고 위태로운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치원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난 그 대자보, "김예슬 선언"을 수없이 읽었다. 결국 그날 강의는, 준비했던 강의안을 물리치고 이 대자보로 갈음하고야 말았다. 성공과 처세를 위한 책 읽기의 환상을 깨뜨려 책에 기어코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면 김예슬은 더 깊은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로 삶이라는 것, 그것도 '인문 삶'이어야 한다는 것. 나는 그의 선언에 좌절했고, 그날 나는, 나의 좌절을 이야기해야 했다. 

정말 인문학인가? 나는 인문이 아니라 인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이는 머리와 가슴보다 더 멀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심리을 전공해서 고통 받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슬픔은 더 큰 슬픔을 가진 자만이 자비의 마음으로 안을 수 있고 상처는 더 큰 상처를 입은 자만이 그것을 승화시켜 치유할 수 있는 것일진데, 학문과 권위와 자기강화를 갑옷처럼 두른 대학에서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86면)  

“우리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만들어 지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겪고 만나고 헤매고 상처받고 저항하고 사랑한 만큼 만들어진다.”(88면)

솔직히 김예슬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절반의 희망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어떤 의심 비슷한 것이었다. 김예슬의 대자보가 저녁 아홉 시 뉴스에 등장하며 여러 이슈를 가져왔고, 찬반 논쟁도 뒤따랐다.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명문대 학생이 아니라, 지방대 학생이라면 이렇게 이슈가 될 것인지에 대해 냉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의 의심은, '기껏 대학교 3학년짜리의 진심'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에 대한, 솔직히 '꼰대' 같은 기우였다. 젊은 치기가 앞날 유망한 한 청년의 삶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고, 혹은 그가 몇 년 후 총선에서 진보 정치의 기수로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다소 삐딱한 기대감을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김예슬의 책이 출간되었다. 아주 작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김예슬의 사유와 결기를 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책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넓었다. 책을 읽고서야, 그에 대해 가졌던 의심은 거듭 좌절하였고, 그 좌절이 나는 너무 기뻤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대학 거부 선언은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 뿐임을. 나는 꼭 해내야 하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야 함을. 그리고 또한 알고 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그 싸움은 말도 주장도 아닌 내가 살아낸 만큼의 삶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수많은 고뇌와 눈물 어린 시간 속에서 결단한 나의 첫 걸음을, 새로운 사람의 길 하나 만들어 내겠다는 나의 떨리는 걸음을, 나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21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

이 작은책은 김예슬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명문대 입학이란 관문을 통과한 직후, '진리는 학점에 팔아' 넘기고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긴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의 민낯을 만나며,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서럽고 다른 걸 하자니 뒤쳐질까 불안하고 또다시 반복되는 행복하지 않은 이 나날들'을 고통스럽게 보낸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대학, 그 대학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모든 인간다움을 멸시하는 탐욕을 '적'들로, '거짓 희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 진보는 이러한 근원적인 가치투쟁에서 매일 매일 패배한 듯이 보였다. 그 결과가 '탐욕의 포퓰리즘'을 들고 나온 이명박 정부 집권으로 귀결된 것이리라. 내가 접해온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 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 경쟁에 매달린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실상 물질적이고 권력정치적이고 비생태적이고 엘리트적이고 남성중심적이고 삶의 내용물에서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71면)

김예슬의 결기는 래디컬적 소망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만나는 다양한 현실적 층위의 실천들을 결행한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사유이며, 그 사유는 인간다움에 대한 오랜 갈망일 것이다. 진리는 그 근원과 다름 아니고, 정의는 그 실천적 삶을 잉태하는 파토스와 다름 아니다. 살아내지 못한 진리는, 더 이상 그 자격이 없다. 그리하여 김예슬은 대학이 아닌, 광장에 섰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에게

놀라운 결단이고 지체없는 실천이었지만, 대학을 거부하고 그만둔 그에게도 마음 한켠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가난했지만 오직 자녀를 위해 헌신하였던, 모든 희망을 자신에게 걸었던 부모였다. 하여 그에겐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것이 '부모산성'이었다고 고백한다. 부모는 졸업만 해달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부모를 넘어섰다. 그 힘든 마음을 이렇게 썼다. 부모를 위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제발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당신의 몸을 빌어 왔지만 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하고 고유한 존재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100면)

나에게는 일곱 살 딸과 네 살된 아들이 있다. 자칫 자식은 나의 오랜 꿈을 위한 존재로 치환된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나의 자식이 이루길, 그리하여 가난한 나처럼 살지말고 세상을 다스리며 사는 자리에 거하길 바란다. 내가 그런 헛된 욕망으로 아이들을 '소유'하려 할 때, 김예슬의 충언은 값진 이정표가 된다. 하여 이 책의 면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 예지가 언젠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김예슬은 다행히 분노에 치우쳐 삶을 만만히 보고 있지 않다. 앞서 나는 그의 치기 어린 열정이, 자칫 너무 큰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하였다. 대학에 가서 학생들에게 김예슬을 소개할 때, 자칫 그들이 김예슬처럼 '무모한 결행'을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난감해 하곤 했다. 그런데 다행히 김예슬은 무엇보다 무모한 로맨티스트가 아닐 뿐만 아니라, 몽상가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가슴 뛰는 삶의 모델이 나에게는 아름답지 않다'고 일갈한다. 그 흔한 롤모델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롤모델에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어떻게 꿈이 직업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며 자신이 선택한, 자신이 가야할 길의 힘겨움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대학 거부 선언을 하고 당당히 대학 문을 나섰지만, 고졸자 신분으로 돌아온 나 역시 막막하다'면서도 김예슬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생각할 틈도, 혼란을 겪을 틈도 없이 거짓 희망의 북소리에 맞춰 앞만 보고 진군하는 것이 훨씬 괴로운 것임을. 그리하여 지금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다른 길을 찾으라'는 고통스런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야 낫는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분명 다른 희망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나는 젊음이라는 빛나는 무기 하나 믿고 위험한 길을 나서는 것이다. 거짓과 더불어 제 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친 듯이 사는 쪽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115면)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대학에 입학할 나의 후배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김예슬처럼 대학을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이처럼 세상과 사람에 대한 근원적 소망을 뜨겁게 품어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실행하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을 그만두건, 계속 다녀 '빛나는 졸업장'을 따건 상관없이, 대학에 물든 거짓 희망을 거부하며 살라고 당부하고 싶다. 대학에 다니더라도 광장에 서길 바란다. 대학에 선 그대에게, 부디 '김예슬'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말대로, '살아있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