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유시민도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들'처럼 살아가길
내가 간직한 유시민의 세 가지 초상(肖像)
"세상이 무서웠다. 사람이 싫어졌다.
민주주의, 자유, 정의, 진보, 조국, 이런 말을 들어도 더는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운명이다>, 249면)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야당이 참패했을 때, 총선 직후 통합진보당이 분열했을 때, 12월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내지 못했을 때, 지난 2월 14일 대법원이 노회찬 전 의원의 유죄를 선고하여 국회의원직을 빼았을 때, 나도 유시민이 썼던 저 마음이었다. 그 무엇에도 설레지 않았다. 유시민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직후 '가슴이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고 썼지만, 결국 다시 정치를 시작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는 '정치인 유시민'으로 지금껏 살아왔던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봄 캠퍼스에서 한 선배가 건넨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달했던 1985년, '서울대 프락치 폭력 사건'에 연류되어 재판받던 당시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은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남겼다. 독방에서 미농지 넉 장과 먹지 석 장에 써내려간 명문이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그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청년 유시민의 문장은 당시 나의 가슴을 한껏 뛰게 만들었고 시대의 불의에 분노하게 만들었다. 유시민은 1992년 한겨레신문에 독일통신원 자격으로 종종 글을 쓰고는 했는데, 당시 그의 글을 스크랩하여 보관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내게 시대를 읽어주는 좋은 선생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여러 매체에 썼던 칼럼과 몇 권의 책들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특히 1988년 펴낸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당시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책이 아직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그릇된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거꾸로 보는 세계사> 1995년 개정판 서문)
유시민의 두 번째 격문, "바리케이드 앞에..."
칼럼리스트와 저술가, 방송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유시민은 돌연 정치에 뛰어든다. 내가 간직하는 유시민의 두 번째 모습은, 2002년 여름 "바리케이드 앞에 화염을 들고 다시 서는 심정"으로 썼다는 또 하나의 격문에 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무현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과 당내 후단협을 비롯한 정치세력에 의해 후보직 마저 위태로울 때, 유시민은 절필을 선언하고 정치인이 된다. 인터뷰에서 그는 절필의 이유를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의무을 다하기 위해서"라고 "한가롭게 칼럼을 쓸 수만은 없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는 훗날 <운명이다> 에필로그에서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는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화려한 학력도 없었다. 힘있는 친구도 없었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열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가 좋았다. 그가 혼자, 너무 외로워 보였기에 그에게 다가섰다."(<운명이다>, 346-347면)
유시민은 노무현에게 가해지는 불의한 반칙에 분노했고, 직접 뛰어들어 그를 구해냈다. 정치인 유시민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노무현 후보는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유시민은 개혁국민정당 대표를 거쳐 16, 17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르나 정치인 유시민에겐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대통령 선거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 철회 선언을 했을 때, 유시민은 밤새 노무현에 대한 지지의 이유를 인터넷에 전파했다. 유시민의 주장은 민주노동당 사표론과 맞물려 진보정당의 미움을 받았고, 집권 내내 노무현 정권의 논객으로 활약하여 진보정당에게는 도저히 함께하기 힘든 정치인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언젠가 전여옥 전 의원과 토론하던 모습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분노와 경멸의 시선으로 전여옥 전 의원을 응시하던 유시민에 숱한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을 그의 지지자로 만들기 충분했을지는 모르나, 겉으론 싸우나 속으론 한통속인 정치인들의 세계에선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가 여야를 막론한 숱한 정치인들로부터 비토당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치인 유시민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와 운명을 같이했다. 그도 실패하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 시절, 그는 동료 의원들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싸가지 없다'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보수와 진보 세력은 공히 그를 '분열주의자'로 비난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의 전형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유시민을 매몰차게 비판하던 강준만 교수도 언젠가 다음과 같이 썼다. 적어도 유시민의 진심을, 강준만 교수는 알았던 것이다.
"여기서 유시민 비판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유시민은 지금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출세나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조국을 위해 강제로 차출당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지방대 교수'다."(<인물과사상> 2005년 5월호)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유시민의 에필로그
유시민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외면하지 아니하고, 2008년 총선에서 대구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낙선한다. 그리고 잠시, 정치 활동을 접고 글쓰기와 강연 활동에 몰두한다. 하지만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유시민의 운명은 다시 기로에 놓인다. 유시민은 서울역 분향소에서 상주 노릇을 하였다. 그때, 고 노무현 대통령을 조문하며 유시민의 슬픔을 보았다. 결코 잊혀지지 않는 슬픈 얼굴로 유시민은 울고 또 울었다.
"내게는 영원히 대통령일/세상에 단 하나였던 사람/그 사람/노무현"(유시민이 쓴 시, "서울역 분향소에서")
내가 간직하는 유시민의 세 번째 모습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의 에필로그이다.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와 노무현을 구하러 나서던 격문이 분노에 찬 결기였다면, 이 글은 망자에 대한 슬픔의 연서였다. 유시민의 글을 읽으며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그렇게 살아 있는 한, 그를 영영 떠나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이후, 정치인 유시민은 다시 질주하였다. 하지만 실패를 향한 질주였다. 때로 그는 실패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국민참여당을 만들어 2010년 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야권단일 후보로 나섰으나 김문수 지사에 석패했고, 2011년 김해 보궐 선거에 이봉수 후보를 야권단일후보로 내세웠으나 다시 낙선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탈당파와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만들었으나 총선에도 실패하고 당도 분열되고 만다. 마침내 지난 대선, 그가 지지했던 문재인 후보도 패배하고, 드디어 '같은 편'이 된 친구 노회찬 마저 며칠 전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그리고 오늘, 유시민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트위터로 전한 몇 개의 문장이 전부였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납니다. 지난 10년 동안 정치인 유시민을 성원해주셨던 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열에 하나도 보답하지 못한 채 떠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u_simin)
민주당은 "착잡하지만 그의 뜻을 존중한다"면서도 "기득권과 기성 정치에 끊임없이 도전한 그의 비주류 정신은 높이 살 만 하지만 그가 서있던 곳에는 분열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라고 논평했다. 적어도 유시민에 대해선,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태도는 구분하기 힘들다. 후안무치한 민주당에 마지막 미련을 버린다. 분열주의자라는 비판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다. 다만 유시민의 정신은, 탐욕스런 위정자들의 공고한 오만함과 결코 함께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여 그는 늘 분열할 수 밖에 없었던 '비주류'였던 것이다.
용서해달라는 그의 마지막 당부가 너무 아프다
지금껏 간직하던 유시민의 세 가지 초상(肖像)을 다시 꺼내 본다.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2002년 노무현 후보를 지키려 나서며 써 붙였던 격문, 그리고 <운명이다>에 붙인 에필로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장들이고 오롯이 담긴 슬픔이자 분노였다. 슬픔은 유시민을 질주하게 만들었고, 분노는 그의 정치적 힘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인 유시민'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토로한 대로 늘 불행했다. 그래서였을까. 퇴임하여 고향을 찾은 고 노무현 대통령은 유시민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청춘의 독서>, 8면)
나의 진심도 '정치인 유시민'의 마지막 인사를 반긴다. 유시민이 사랑하는 딸에게 썼던 것처럼, 유시민도 이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살러 온 존재'로, 자신의 길을 가길 바란다. 행복한 '자유인 유시민'을 보기 원한다. 허나, 용서해 달라는 그의 마지막 당부가 못내 서럽고 아프다. 불의와 반칙에 맞선 분노에 찬 결기를, 이제 어떤 정치인에게 찾아야 하나. 도대체 가슴이 설레지 않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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