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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퀸> 인터뷰

Soli_ 2015. 1. 13. 10:13

<월간 퀸> 인터뷰_2015년 2월호





1.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서른 살부터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첫 직장에서 삼십 대를 보냈어요. 그리고 두 번째 직장인 책담에서 일하고 있지요. 첫 직장에서 맡았던 업무 중 하나가 독서와 글쓰기 운동이었어요. ‘문서학교’를 맡아 독서와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였고 여러 대학과 교회 등에서 독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문서운동가’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그 출판사를 그만두고 “예지원”(http://soli0211.tistory.com)이라는 블로그를 열었어요. 그간 썼던 서평과 에세이 등을 모았지요. 지금 다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지만, 저의 정체성은 ‘문서운동가’에 여전히 가까운 것 같아요. 세상엔 너무 많은 책들이 존재하고 지금도 태어나지만, 한편으론 너무 좋은 책들이 자신의 독자를 만나기도 전에 소멸하기도 하거든요. 좋은 책이 없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책들이 자신의 독자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좋은 책을, 그 책의 독자들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도 틈나는 대로 서평을 써서 올리고 강의를 다닙니다. 언젠가는 “예지원”이라는 카페를 열고 싶어요. ‘독서학교가 열리는 동네카페’를 여는 것이 제 꿈이죠. 



2. 책담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계신데, 책 만드는 일을 하시게 된 계기는?(어릴 적 꿈이라든지, 어떤 책을 읽고 난 후라든지.)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열다섯 살 때 쓴 시를, 열일곱 살 때 작가들과 문학평론가들의 송년모임에서 읽기도 했어요. 그때 이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글 쓰는 걸로는 밥벌이를 하기 힘들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가난했거든요. 제겐 밥벌이가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학부에서 저를 아끼셨던 교수님께서 대학원 학비까지 지원해주셔서 다녔는데도 힘들더라고요. 일단 휴학을 하고 돈을 좀 벌어서 유학을 가자고 생각했는데… 그 출판사에 10년을 다녔네요.


한편 저는 (감히 말하자면) ‘책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적, 저를 구원한 것이 책이었죠. 책은 제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이었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이광주)를 즐기는 시공간이었어요. 청소년 시절엔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품인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버텼고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을 읽으며 세상을 배웠고, 청년 시절엔 예언자들(아브라함 요슈아 혜셀)이나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같은 책들을 읽으며 결기를 다졌죠. 편집자로서 저의 꿈은, 이런 책들을 만드는 거예요. 



3. 추천하고 싶은 책은? 추천하는 이유와 어떤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지?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서준식, 노사과연, 2008)을 추천하고 싶어요. 서준식은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유학을 왔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학생이던 1970년 북한을 다녀왔고 이듬해 간첩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7년, 자격 정지 15년 형을 선고 받았죠. 징역형을 꼬박 살아 낸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갇혀 있었어요. 사상 전향을 거부한 까닭에, 사회안전법상의 피 보안 감호자로 10년을 더 갇혀야 했던 것이죠. 이 책은 그때 쓰여진 17년 간의 편지들을 모은 겁니다. 



서준식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 내는 양심의 문제였어요(“저의 지상 목표는 ‘석방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16면). 타협할 줄 모르는 공산주의자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국가가 간섭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고 거부하였던 자유주의자이었죠. 그리고 그는 스스로 수인(囚人)이 되어, 지인들에게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약자에 대한 연민에 대하여,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적었어요. 아름답고도 처연한 결기가 서린 책이에요. 


“부지런히 노력하고 무언인가를 이루어놓은 것, 세상의 온갖 악이나 어리석음과 타협하지 않고 강직하게 살아가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분노할 줄 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그 얼마나 중요한 일들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끝끝내 버릴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소망에 더하여 나에게는 요즘 또 한가지 작은 소망이 생겼다. 좀더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572-573쪽)


희망이 멈출 때면 찾는 책이 있어요. 거친 분노, 그마저도 품고 보듬게 만드는 책들이 있어요. 너무 바쁜 나날들에 몇 번씩이나 호흡을 멈추게 하는, 나의 일상적 게으름 내지는 관성과 타성에 젖어가던 무미건조한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너무 아파 주저앉을 찰나 가쁜 숨으로 다시 내달리게 만드는 책들이 있죠. 제게 있어, 서준식의 책이 그러합니다. 


서준식처럼 감옥은 아니겠지만, 자본주의적 계급사회나 승자독식사회, 또다른 여러 이유로 ‘닫힌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래서 그 무력감에 좌절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책을 곁에 두고 읽으시면 좋겠어요. 단절의 고통은 존재로 하여금 또 다른 존재와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갖게 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존재들은 닫힌 공간에서 되려, 더 ‘착한 존재’가 되어 타인과 세상을 향한 더욱 처연한 사랑을 각오하지요.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란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도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도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란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569쪽) 


온갖 검열을 피해 수인이 써 내려간 글에 오롯이 담긴, 고립과 단절의 고통을 극복하는 결연한 의지, 그리고 그리움, 사랑, 꿈들로 가득 찬 벅찬 희망을 애써 기억해야 합니다. 희망은 절망 따위에 좌절하지 않으니까요. 숱한 폭력과 절망들이 엄습해 올 때면 더욱 가까이 두고 천천히 곱씹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서른 살 겨울, 마흔 살 겨울에 읽었어요. 곁에 두고 읽기는 했지만, 작정하고 완독한 건 딱 두 번이네요. 900쪽이 넘는 책이거든요.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추운 겨울날이었죠. 공부에 대한 욕심을 접거나, 10년 간 일했던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에요. 좌절하고 절망하던 때, 저를 다시 일으킨 책이죠. 혹시 지금, 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지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책을 만나시길 권해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