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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을 위한 불경한 책

Soli_ 2017. 1. 4. 00:30

■〈CMR〉(기독경영연구원) 2017년 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을 위한 불경한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

사울 알린스키 지음정인경 옮김생각의힘 펴냄|2016



미국의 지난 대선 정국에서 샌더스 열풍이 거세게 불었을 ,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하나의 유령이 미국을 배회하고 있다. 사울 알린스키라는 유령이.” 이는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시작하는공산당 선언》  문장의 오마주다. 


2015~2016 미국 정치 혁명의 주역으로 부상했던 버니 샌더스는 무명의 아웃사이더였다. 샌더스는 스스로를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면서 부의 불평등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고 ‘1퍼센트에 맞서는 99퍼센트 싸움을 이끌었다. 샌더스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사울 알린스키(1909~1972) 만날 있다. 시카고는 알린스키의 도시였으며, 샌더스와 오바마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들은 민중과 더불어 개혁을 도모했다. “대중적 개혁이라는 지지 기반 없이 정치적 혁명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을 요구하는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는 알린스키의 가르침은 시카고의 거리에서 비롯되었다. 


1970타임〉 알린스키 사상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바꾸고 있다고 논평했다. 1960년대 인종차별에 맞섰던 샌더스는 알린스키의 조직에 속해 있었고, 유력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은 1969 학부 졸업 논문을알린스키 모델 관해 썼으며, 1980년대 시카고에서알린스키 병법 전수받아 활동한 버락 오바마는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알린스키의 제자가 대통령이 되고, 명이 다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격돌하였지만, 오늘날 알린스키는 여전히 주변화되어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 체제에서,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2008 민주당의 대선 후보 자리를 놓 경쟁했던 오바마와 힐러리는 과거 알린스키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해 침묵과 부정으로 일관했다. 급진주의자라는 낙인은 하나의 불온함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알린스키는 자유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니다. 오직 그는 급진주의자로 호명된다. 급진주의자는 오랜 세월이 쌓아 올린 관습과 정통의 습속을 거스르는 자다. 모든 신성시되는 것들을 부수는 우상파괴자다. 기성의 가치에 질문을 던지고 현존하는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불경한 자들이다. 


급진주의자가 불경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미래를 꿈꾸면서 불합리한 세계를 변혁하려고 하는 급진주의자는 소수가 권력과 자원을 독접하는 불의한 현실에 맞서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킨다. 미국 역사에서 급진주의자는 영구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 흑인노예제의 폐지를 위해 싸운 이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 이들이다. 알린스키는 목숨을 내걸고 싸운 급진주의자들이 없었다면 인류가 평등과 정의를 향해 전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역자 서문에서)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 전설적인 지역사회 조직가이자 참여 민주주의의 사상적 뿌리라고 일컬어지는 알린스키의 책이다. 그의 번째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세계 시민운동가들의 바이블로서 실질적 활동 교본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책에서성나고 무모하고 불손한청년 알린스키는 정제되지 않은 뜨거운 언어로 사람들의 정신에서 뭉근하게 끓고 있는 저항의 결기를 들쑤시고 그들의 마음에 인간 존엄의 회복을 위한 투쟁이라는 불을 지핀다. 나이와 세대를 막론한 모든 불온한 청년들에게는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 현장의 활동가들에게는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추천하고 싶다. 


급진주의자는 민중들과 자신을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며 시민들의 완전한 경제적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위해 격렬하고 비타협적으로 싸운다. 급진주의자는 인간의 마음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불꽃을 지핀 인간 횃불이었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고 공포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들은 급진주의자라는 모멸을 오히려 명예의 증표로 받아들였으며, 자유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 


인간애를 발휘하고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점은 자유주의자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자유로운 열린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알린스키가 보기에 자유주의자들은 머리로만 인간을 사랑할 뿐이고, 장광설로만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무엇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권력을 두려워한다. 알린스키는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급진주의자가 지향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부각한다.


자유주의자는 저항하지만 급진주의자는 반역한다. 자유주의자는 분개하지만, 급진주의자는 격노하고 행동을 개시한다.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바꾸지 않은 생활의 작은 부분만을 대의에 바치지만, 급진주의자는 대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는다. 자유주의자들은 구두 변론을 주고받지만, 급진주의자들은 고되고 더럽고 쓰라린 생활 방식을 주고받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종종 대법원이나 의회 존경받는 상층부로 올라가는 반면, 급진주의자들의 이름은 대리석에 새겨지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은 인간의 마음에서 영원히 타오른다. 자유주의자는 부드러운 신념을 지니며 그것은 전투의 더러움, 졸렬함, 고통, 박해, 비통함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있다. 반면 급진주의자는 직접 행동의 고된 행보로 무감각해진, 질긴 확신을 가지고 있다. (…) 자유주의자들은 꿈을 꾸고, 급진주의자들은 인류가 꿈꾸는 세계를 건설한다.(본문에서)


책은 194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알린스키의 문제의식은 오늘의 상황에도 대체로 적확하다. 그는 노조운동이 고용주와 고용인의 단체 협상을 기반으로 작동하며, 노조가 자기 정체성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체제를 옹호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본래 급진주의자가 신봉하는 원칙들을 옹호자였지만, 강력하고 부유해지면서 이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 거래를 서슴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이는 작금의 우리나라 노동 현실과도 닮았다. 


알린스키는 자유주의자와 노조의 행태를 비판하며,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시민들을 사회 변혁의 주체로 등장시켜야 한다. 빈곤, 무지, 타락으로부터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단결된 힘을 길러야 한다. 하여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 바로 인민조직의 건설이 필요하다. 인민조직은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스스로 창설하고 운영해야 하며, 이를 처음에 착수하고 곁에서 돕는 조직가의 일이 중요하다. 알린스키가 평생 해왔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책은 인민조직의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안한다. 조직화, 투쟁, 교육, 심리 분야의 전술과 책략과 이러한 전술을 실행할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대한 세세한 지침을 제시한다. 특히 그가 지역 현장의 조직가들과 함께 여러 우여곡절과 실패를 딛고 성공에 이른 경험들은 매우 감동적이다. 


급진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막연한 이상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신과 타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향상시키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불의에 맞서는 일은 결코 고상한 지적 논쟁이 아니다. 성명서나 낭독하며 도덕적 승리에 취한 자들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깨부수고 권력을 쟁취한 시민들에 의해 민주주의는 진보한다. 


책은 1946년에 출간된 Reveille For Radicals》 1969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60대의 알린스키가 30 알린스키를 회고하며, “뜨거운 분노를 차가운 분노로 식히고, 직관적인 불경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반대파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의를 제기하고, 숙고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소크라테스 금언의 가치를 깨닫고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에서 나는 변했다, 그러나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나는 (여전히) 불경하다, “나는 청춘을 배신하지 않았다 거듭 고백한다. 


1946년의 책이, 1969년의 미국 사회는 물론, 2017 벽두의 우리나라에서도 어김없이 공명하는 이유는, 아직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기상 나팔(Reveille For Radicals), 책이 널리 읽히기 바라는 마음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