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평] <노무현이 우리들과 나누고 싶었던 9가지 이야기>
(이백만 지음|바다출판사 펴냄|2013년 5월)
2009년 5월 23일 오전, 서해의 작은섬 덕적도는 고요했다. 봄의 햇살은 바다와 땅의 경계를 허물며 단단한 빛깔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여행의 막바지 여흥을 즐기던 토요일 아침이었다. 그때, 다급한 전화가 울렸다. 내 핸드폰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핸드폰에도 거의 동시에. 불길함을 예감하며 받던 전화 너머로 노무현 전(前)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각기 다른 이들이 거의 비슷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뜨거운 슬픔이 나라를 장악했다. 가슴을 여미던 슬픔은 전국 곳곳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숱한 울음으로 흘러넘쳤다. 대통령 후보부터 재임 시절까지 '자격 미달의 대통령'으로, 퇴임 후 갖가지 의혹들을 거론하며 '파렴치한 대통령'으로 비난하고 희롱하던 언론들은, 돌연 최고의 찬사를 추념의 말들 속에 슬쩍 섞었다.
그는 가장 뛰어난 대통령은 아니었을망정 가장 뜨겁게 사랑 받았던 대통령이었다. 그것만은 분명해 보였고, 그것을 확인한 어떤 이들은 다시 노무현이란 이름이 두려웠고, 어떤 이들은 그 이름에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전자의 두려움은 '친노종북' 프레임을 내걸었고, 후자의 희망은 '친노의 부활'이란 성급한 야심을 탐했다.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한 전자는 '노무현'을 다시 희롱하기 시작했고, 패배한 후자는 더욱 야멸찬 비토로 피아(彼我)를 구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무현 서거 4주기를 맞이하는 오늘, 다시 '노무현의 정신'을 묻는다.
노무현의 '말'을 복원하다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이백만은 120여 개의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을 모으고 해설을 입혀 <노무현이 우리들과 나누고 싶었던 9가지 이야기>를 펴냈다. '왜곡의 유리벽에 갇힌' 원형 그대로의 말을 복원하였으므로, 그 어록은 기실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일 것이다. 그 화두는 보다 구체적으로 국가의 역할, 경제의 본질, 민주주의, 정치의 희망, 평화, 역사, 진보의 미래, 다음 세대, 사람 사는 세상 등의 9개의 주제로 정리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비토의 대상이었다. 그는 좌파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자로 비토되었다. 야당에게 권력을 양분하는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분열주의자로 비난받았다. 진보정당의 반대에도 이라크 파병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했지만, 그는 늘 종북주의자로 의심받았다. 한미 FTA를 추진했지만, 그는 반 시장주의자로 공격받았다. 검찰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검찰은 도리어 퇴임 후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가치나 정책의 당위를 떠나 그는 숱한 왜곡에 시달려야 했다. 보수언론은 그의 말에 앞뒤 맥락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왜곡했다. 이 책의 의의는 그 왜곡된 말의 진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노무현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가치들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말의 맥락을, 당시 대통령을 보좌했던 참모들의 해설과 배경을 곁들어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9월 광주에서 언론인과의 대화모임을 가졌다.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간담회였다. 실제 발언은 이러하다.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호남에 대해 반드시 의리를 지키겠다. 호남 사람들이 나를 선택한 것은 전략적으로 볼 수 있으며 사실 내가 유일한 대안이 아니었나. 호남 사람들의 당시 정서는 이회창 후보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지역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경상도 사람인 나를 선택하게 된 것 아니냐."(본문 186쪽)
그러나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호남 사람들이 나를 위해 찍었나요? 내가 예뻐서라기보다 이회창 후보가 싫어서 찍은 것 아니냐."(본문 186쪽)
언론은 대통령의 말을 '호남 비하 발언'으로 왜곡 보도하여 대통령은 졸지에 배신자가 되었고 호남 민심은 싸늘하게 식었으며, 지금까지도 '친노'는 호남에선 비호감이다.
'노무현 정신'의 민낯
저자 이백만은 노무현의 말들, 그 정신의 민낯을 '질문'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노무현은 질문했고, 그 답을 찾았다. 간혹 착오가 있었고 실패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성공한 부분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소위 ABR(Anything But Roh, 무조건 노무현과 반대로) 지침 아래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무차별적으로 폐기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등장하며 노무현의 정책들은 재평가되고 되살아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비전 2030'은 박근혜 정부의 '한국형 복지국가'에 영향을 주었고, 과학기술 정책 강화(과학기술부 복원), 행복도시(세종시) 건설 등의 정책도 다시 추진되고 있다.
'노무현 정신'을 일면하고 싶다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갈피마다 새겨진 말들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의 민낯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맥락을 이루는 서사들은 종종 사무치도록 감동적이다. 특히 탈권위적 대통령의 모습은 우리의 그리움을 자극한다.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낸 이은희씨의 회고다. "청와대 들어가서 한 달이 채 안 됐을 무렵이다. 출근길에 소나기가 내렸는데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에 근무해온 목수 아저씨였다. 청와대 생활만 햇수로 30년.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영욕을 지켜봐온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나는 영부인께 목수 아저씨 이야기를 했다. 며칠 후 대통령이 그분을 만났다. '청와대에서 제일 높은 분이 계신 줄 모르고 인사가 늦었습니다.'"(본문 63쪽)
"법치주의란 국민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권력이 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노무현의 말은, 스테판 에셀이 강조한 "법의 수호자는 이상의 수호자다."라는 당위에 닿아있고, 용산 철거민과 쌍용차 노동자 등을 에워싸고 겁박하던 이명박 정부의 법치주의에 맞선다. 특정 대통령 후보를 편든 것으로 의심되는 이명박 정부의 검찰과 국정원은, "검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십시오.",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다시 대통령이 되어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노무현의 말을 더욱 그립게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지만, 생색내지 않았고 브라질과의 협상에서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며 시가를 피우던 룰라 대통령에게 투박한 영어로 "Give me a cigarette!(시가 한 대 주시오!)"라고 말하며 퉁 치던 멋진 사람이기도 했다.
'실패한 대통령'의 진심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의 죽음을 듣고 울었고, 분향소에서도 울었다. 그가 남긴 글과 말들을 읽으면서도 울었고, 앞으로도 사무치는 그리움에 간혹 그런 날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그 자신의 평가였다. 역설이 아닌, 직설의 언어였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완의 설명이다. "노무현은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실패한 대통령'으로 규정한 첫 대통령이다. 그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실패로 규정한 것은 그가 평소 즐겨 사용했던 어법상의 역설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못 박았다."(본문 211쪽)
그를 좋아하지만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기지 건설, 한미 FTA 등의 정책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선의로 추진했던 정책들도 좌초되기 일쑤였다. 지지자들이나 여당조차 제대로 설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라는 대통령의 말은, 무능의 고백으로 들렸다.
저자는 "정치인의 어록은 삶의 증거"라고 말하며, 노무현의 말을 옹호한다. 저자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서술이 다소 편파적이라는 것도 안다. 따라서 나는 노무현의 말을 무조건 옹호하기보단 그저 그의 민낯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다. 말과 달랐던 정치적 행보도 똑같이 적시하고, 실패한 다짐으로 끝난 말들의 이유도 기록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뒤, 한 지지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대선 패배를 자신의 부족함으로 고백한 것이다. 누군가를 비토하고 스스로 고취하고 고립되는 정신은, 또 다른 왜곡이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신'은 실패를 고백하고 다독이는 연대에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