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_

페이스북 단상_2013/03/20-04/03

Soli_ 2013. 4. 3. 23:31

2013/04/03


_우리집 모자간 평범한 대화.


엄마: 예서, 너 아저씨지?!

예서: 아야, 나 빵꾸야!

_어제 저녁의 행복에 대해 짧게 썼더니 많은 분들이 덧글과 메시지로, 문자로 물으신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보통 어떤 행복은 성취감과 동일시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떤 성취, 어떤 성공은 행복하다. 성취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일 자체가 그렇기도 한다. 유시민도 하고 싶은 일을 밥벌이로 삼는 행복을 갈망한다고 했다. 마땅히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허나, 어떤 일이나 성취, 성공 같은 것과는 다른 차원의 행복이 있다. 사람과의 만남이다. 난 아내 순일을 만나 행복하다. 평생 지속가능한 유일한 행복일 것이다. 어제 저녁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그러했다. 어떤 만남은 그 자체로 나를 위로하고 다독인다. 그의 상처가 나의 상처에 답한다. 보잘것없는 상처란 없다. 속깊이 숨어있던 나의 속사람은 가만히 고개를 쳐든다. 지음(知音)의 벗을 만났기 때문이다. 섣부른 언어가 앞선 만남은 무위하다. 만남은 존재론적 행복이다. 이름이 아닌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의 집에 초대할 거다. 아내에게도 좋은 벗이 될 거다. 그 행복의 정황은 "복음과상황" 5월호에 드러날 것이다.



_서평에 대한 질문에 답하다.


"서평에는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텍스트를 진중히 읽고 곱씹어 저자의 진심을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책의 내용을 모두 요약하는 것은 서평이 아니지요. 간혹 텍스트를 잘못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진심을 서평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둘째, 독자의 지평에서 저자의 진심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서평가 본인은 물론, 이 서평의 독자를 고려해야겠지요. 소통하고 유통하는 것이 서평의 소명이지요. 셋째, 완성된 좋은 글이어야 합니다. 비문을 없애고, 논리를 단순화시키되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쉬운 문장에 깊은 사유를 담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사실 저도 잘 못하는 부분이지요. 다만 그렇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_어제 집에 늦게 들어와서 예지를 보지 못했는데, 책상에 예지의 선물이 놓여 있더라. 오늘의 몫을 위해 길을 나서기 전, 예지의 그 빛나는 마음을 만지작만지작거린다.




2013/04/02


_오늘은 종일 "복음과상황"과 함께 했다. 특히 저녁에 나한테 주어진 미션은 몹시 두려웠으나, 지금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송강호 박사님의 책을 출간한 날 이후, 가장 행복한 날이다. 감동스럽다.



2013/04/01


_집에 귀가하자 막내 예서가 달려와 안긴다. 그리고 외친다. "아빠, 좋아!" 그러자 누나 예지가 다가와 동생 예서 귀에 뭔가 속삭이는데... 나한테까지 들린다. ("예서야, 아빠 나중에 할아버지 될 건데 그래도 좋아?") 나쁜 놈.


_김기석 목사님의 인터뷰 기사 링크를 공유하며(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3805


난 평화를 말하는 사람 중에 그 삶의 언어와 태도에서도 평화로운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보지 못했다. 종종 평화를 말하는 '어떤' 사람들의 언어는 거칠었고, 작위적이었고, 진영 논리에 급급했고, 강고한 논리는 공격적이었다. 가끔 그들에게 상처도 받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두 명을 '알고' 있다. 한 분은 송강호 박사님이고, 또 한 분은 김기석 목사님이다. 두 분의 글과 설교, 강의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경험하여 안다. 그분들은 틀림없는 평화의 사람이다. 뉴스앤조이에서 김기석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참 좋다. 


"세상에서 고단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건 세속화된 종교입니다. 교인들이 좀 떨어져 나가도 괜찮습니다. 진짜 교인들이 남아야 합니다."

"평화는 아주 소박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데 평화를 말하는 건 거짓말입니다."


2013/03/30

_예지 책상 위. 예지는 저 달걀을 위해 집을 만들고 솜으로 자리를 만들어 이불을 덮어주었다. 달걀이 언젠가 병아리가 되리라 굳게 믿는다.




2013/03/29


_코넬 웨스트는 '공동선'을 종교와 세상, 종교와 민주주의를 잇는 고리로서 제시했는데, 기독교인은 이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공동선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진, 쉬운 언어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환대의 잔치와 급진적 실천으로 도모되어야 할 것이다.


_어머나, 이런 일도 있군요.

http://www.ohmynews.com/NWS_Web/bbs/bbs_index.aspx?pBOARD_CD=M0103&pBBS_CD=000001138991&srchgb=1&srchtxt=&pSRS_CD=0&pBbsPageNo=1&mode=view


_너는 세상이 네게 무얼 해준 게 있다고, 이렇게 시린 봄날 피어나 위태롭게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리 환하게 웃고 있느냐.




_도서관에 와서 '고난'을 잠시 묵상한 후, 곽노현 선생님의 가석방 소식을 듣는다. 고난 당한 이의 당당함은 저리 환한 웃음으로, 그 의로움을 과시한다.



2013/03/28


_아내의 귀환과 더불어 우체통에 놓인 반가운 선물, <느헤미야 팟케스트1-세습 목사, 힐링이 필요해?>. 출판사 그만 두고 지금까지 못내 아쉬운 건, 김근주 교수님의 책을 만들지 못한 거다. 그 아쉬움이 시나브로 돋는다. 좀 읽어봤는데, 꼭꼭 씹어주는 통쾌함이 아슬아슬 재밌고나. 책 예쁘게 잘 만들었다! 느헤미야도, 홍성사도 참 멋지다!



_곧 출간될 아바서원의 책들. 모두 기대되는 책들이다. 김영철 목사님과 이기섭 작가님 등 한국인 저자의 책들이 있어 특히 반갑다. 클레어본의 책이 다시 살아난 것도 반갑다(규장은 이 책의 실패를 제목에서 찾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대로 간다니 어떨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책들로 아바서원 식구들도 힘과 위로를 얻으시길 기도한다.


_"내 영감의 한가지 원천인 선지자적 기독교인들은 불평등에 굴종하거나 타협해 들어가지 않았어요. 현실에 저항하며 세상을 이끌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선지자적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코넬 웨스트)


_아이들 깨우고 씻기고 유치원 보내기, 청소하고 빨래하기, 밥하고 반찬 만들고 설거지까지 뭐든 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선 아내보다 잘 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질문하고 묻고 반응을 요구하는 아이 곁에 있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다. 책을 읽다가도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로 인해 맥락을 잃고 책을 덮는다. 잠깐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것, 한바탕 신나게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것은 생명을 견디는 일이다. 무엇보다 아빠에게 아이는 타자의 생명인 까닭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든 엄마들에게 아이는 그 자신의 생명과 다름 아니다. 로버트 서먼이 말한 '평화를 지키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여성'을 묵상한다. 그런 면에서, 여성을 통해 '엄마 하나님'을 묵상한다. 이 짧은 글을 쓰는데도 수없이 나의 곁으로 달려와 말을 거는 예서를 애써 물리치며, '마라나타 (엄마)하나님!'을 속으로 곱씹는다.


_엄마 없을 때 아이(스크림) 먹기. 뒤에 보이는 것은 밤새 예서가 쉬한 이불.




2013/03/27


_철봉에 대롱데롱... 예서 고문하는 중.




_미하이 칙센트미하이-안희경 대담,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중에서.


"어린이들이 팀을 이뤄 함께 풀어가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융화란 함께 풀어나가는 겁니다." 

"저는 혼자서 잘하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학생에게 자율권을 주고, 학생 스스로 배움에 책임감을 갖게 하고, 동료와 함께 팀을 이뤄 문제를 풀어가게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교육 시스템이 갖춰야 할 요건입니다."
"교육은 경주가 아니라 여정(旅程)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졸업한다면, 길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요."
"창의력으로 향하는 첫걸음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답은 오직 한 가지라고 가르치기를 멈추는 겁니다."


_2005년 4월에 결혼한 이후, 나와 아이들이 동행하지 않은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내의 첫 번째 여행. 그것도 고작 이틀간의 짧은 여행일 뿐인데, 허락받을 일도 아니고 그런 기회를 진작에 만들지 못한 나를 원망해야 할 터인데, 아내는 며칠 전부터 계속 미안해 했다. 그녀가 새벽에 떠난 후, 예지를 깨워 밥먹이고 유치원 보내고 예서와 함께 동네 놀이터에서 한바탕 놀았다. 그리고 봄볕에 잘마른 옷가지를 고이 접아 옷장에 넣는다. 점심을 먹고 예지가 오면, 호수공원에 갈 것이다. 날마다 주어진 소명이 아니라, 결혼 8년만에 주어진 단 이틀간의 소명일 뿐이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힘들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여야 할지, 무엇을 하며 놀아야 할지, 그리고 집안일도 아내만큼 매섭게 하지 못하니 그것도 걱정이다. 아내의 부재 속에, 아내의 희생을 배운다. 그녀의 부재 속에 그녀의 존재를 더욱 또렷이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아내의 삶, 엄마의 삶... 이런 것 말고, 그녀의 삶이 소담스럽게 영글기를, 이제부터라도 그녀 스스로 자애(自愛)의 길을 소명으로 살아내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 글은 아내에겐 비밀이다. 쉿.




2013/03/26


_오늘 읽었던 복음과상황 4월호의 "편들고 싶은 사람" 편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우연 혹은 필연.


"오늘날 우리는 지속 가능한 다른 종류의 혁명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앎의 혁명이며 지식의 혁명인 차가운 혁명입니다. 깨달음의 혁명이고, 혁명을 깨우는 겁니다. 그 핵심은 여성이 해방되는 겁니다. 여성이야말로 차가운 영웅들이니까요."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은 남성에게 억압과 폭행을 당해온 시절에도 먹이를 찾아 아이를 양육하며 가정을 이끌고 삶을 이어오면서 평화를 지킨 중심이었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는 본성을 아직도 많이 가진 존재가 여성이죠. 그 여성이 남성에게 군국주의적, 산업적 탐욕을 멈추라고 명령해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로버트 서먼-안희경 대담,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중에서. 


_어제 만난 출판계의 선배님 하신 말씀이 가슴에 남았다. 다르게 표현하셨지만, 우린 어차피 홀로 서야할 운명이라는 것. 그런데 그는 낯선 나를 찾아와 위로하고 자극하고 격려했다. 홀로 걷는 길이라도 외롭지만은 않겠다. 그리고 그것이면 됐다.


_"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고 투명한 세상이었다면 예술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알베르 카뮈)


_추운 봄날 무심한 하늘을 올려 본다. 저렇게 푸른 하늘이라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푸른색은 본디 차가운 빛깔 아니던가. 하늘이 무심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과했던 것.



2013/03/25


_추억속 선생님께 드릴 나의 선물은 '평화'. 그분이 혹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흔쾌히 고를 수 있는 두근두근 나의 진심.



_"혼자가 아닌 곳에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디론가 외출하고 어디론가 떠난다"고, "심심함이 윤기 나는 고독이 되어갈 때 나는 씩씩해진다"고 썼던 김소연 시인이 함민복의 시 한구절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 닿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 혼자일 것, 떠날 것, 고독할 것, 씩씩할 것, 그래서 경계에 피는 꽃이 될 것. 시인의 마음을 빌어 그대를 응원함. — 쵱혱영님과 함께


_우린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거대한 지구, 평생 걸어도 끝에 닿을 수 없는 땅 위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나의 세계'의 크기는 반대가 아닐까 싶다. 우주와 지구 따위에 대한 사유는 형이상학의 개념으로 기억될 뿐이고, 땅끝도 잠깐의 낭만 혹은 아득한 꿈의 저편에 머물 뿐이다. 나의 가장 큰 세계는 늘 부딪히며 살아가는 좁디좁은 시공간 안에 펼쳐진다. 무엇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나의 세계는 결국 나의 정신, 사유, 마음일 것이다. 김수영 시인이 거대 세상에 대해선 침묵하지만 보잘것없는 이웃에게 소리치며 분노하는 자신을 책망하였듯이, 세상과 타자를 향한 분노 이전에 자신의 보잘것없음에, 내 속에서 꿈틀대는 온갖 음모들에 분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_정우영 시인의 시창작교실 링크를 공유하며.


나는, 내가 시인이 되지 못한 것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열다섯에 쓴 시를 열일곱에 시인들의 문예지에 실었고, 스물에 시작법을 배웠지만, 난 끝내 시가, 시인이 된다는 것이 내게는 가당치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용기가 있었더라도 좋은 시인이 되기는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런 강좌 소식만 들어도 가슴은 난데없는 뜀박질에 헉헉댄다.



2013/03/23

_전의우 목사님의 서평을 공유하며.
http://blog.naver.com/ctrans01/140185080162

나의 꿈이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기껏 나의 실패로 그 꿈이 좌절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꿈은 그처럼 품어야 하고, 실패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처럼 치열하게 성찰해야한다. 그립다, 나의 대통령.


2013/03/22

_어제 너무 많은 말을 해서인지 도무지 오늘은 원고에 집중할 수가 없다. 텍스트 사이사이의 여백이 계속 말을 걸어온다. 탄로난 결핍이 여러 갈래의 욕망으로 발현한다. 오늘은 잠시 멈춰야겠다. 느릿느릿 걸어 어스름한 저녁 하늘이 감은빛에 닿을 즈음, 아내의 품에 안겨야겠다. 예지와 왈츠를, 예서와 입맞춰야겠다. 소란스럽던 가슴이 원래의 빛깔로 잠잠해질 즈음, 다시 시작해야겠다. 그래서 한밤 중이 되더라도 그게 빠르겠다.



_전의우 목사님의 "청어람 독서출판컨퍼런스 리뷰"를 공유하며.
http://blog.naver.com/ctrans01/140184902423

어제 밤잠을 잘 못잤다. 경솔하고 헛헛한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은 아닌지, 그저 나의 당위를 강요했던 것은 아닌지. 그래도 좋았던 것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페친이었던 분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익힐 수 있었다는 것, 치열히 숙고하며 분투하며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전의우 목사님을 뵐 수 있어 좋았다. 강사로 모셔야 할 분인데 250km를 달려 오셔서 강의를 들어주셨다. 무례한 나의 이야기를 너그럽고 인내하셨고, 좋은 것만 골라 칭찬해주셨다. 지혜가 나를 '삼촌'이라 부르듯, 나도 목사님을 '삼촌'처럼 만나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또 뵐 수 있기를.

_정발산 올라 앉아서 아내가 보낸 사진을 보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 잡고 올라오시더니 내 옆에 앉으신다. 근데 할아버지가 대뜸 내게 "나무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여기까지 올라와서 핸드폰을 보고 있냐! 암튼 젊은 것들은."하고 톡 쏘신다. 옆에 계신 할머니가 "아니 볼 것이 널렸어도 지 새끼 보겠다는데 영감이 뭔데 씨부리는겨!"하고 할아버지를 받아친다. 그리곤... 두 분 싸우신다. 고마...ㄴ 내려가야겠다. 슬그머니.


_"책은 모름지기 누군가의 사연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글씨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마음
덕분에 위태롭던 희망이
위로를 얻는다.
  이지혜님과 함께






2013/03/20


_이권우가 '이크의 책 읽기'를 이야기했는데, 페이스북에도 간혹 '이크'의 여백이 존재한다. 내겐 지강 선생님의 글이 그렇다. 대개는 아주 불편한 글이고, 이번에도 그렇다. 자신을 알리고픈 내밀한 욕망 저편에는 생존에 대한, 그리고 자기 존재를 확인해야만 하는 심리적 절박함이 존재할 것이다. 또한 욕망의 문제를 도덕적 딜레마에서 그만 해방시킬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문화권력'이나 '강연에도 불려나가는 폼나는 생활'은 내겐 가당치 않는 것으로 느끼고 스스로를 '복음주의권'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까닭에, 어찌하던 이번 글은 그냥 지나치고 싶었다. 허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대목에선 피할 수가 없다. 적어도 이 비판은 나에게 유효하고 적절한, 나의 몫이다.




2013/03/20


_파란 하늘을 찍기 위해선, 태양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곳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태양은 푸른빛마저 자기 것인양 탐낸다. 허나 태양은 그저 지나갈 뿐, 하늘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품고 있다. 아침에 흩날린 때아닌 눈발도 그렇다. 바람이 매섭다. 그러나 봄은 온다. 하늘은 벌써 봄의 색이다.




_루이스는 "나는 태양이 떴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루이스의 이 멋진 문장에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새롭고도 신나는 방식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일관성 있데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해준다는 것"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C. S. 루이스의 책 중에서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학비평에서의 실험>이라는 책이 있다. 1961년에 출간된, 루이스의 마지막 책이다. 

루이스는 이 책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의 함의를 다룬다. 책 중에서도 문학 장르를 주로 다루나, 그의 함의는 모든 예술까지 포괄한다. 예술을 이용하는 사람과 예술을 수용하는 사람이 있다. 루이스는 예술을 기껏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도구화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그것은 마치 삶의 의미를 재화의 소유 정도로 이해하는 천박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 예술은 단지 삶을 세련되게 하는 또다른 소유물일 뿐이다. 하여 루이스는 예술을 수용하는 삶을 권한다. 

이것은 책을 읽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수의 독자는 어떤 책을 두 번 다시 읽는 법이 없다. 독서는 심심풀이일 뿐이며 대체할만한 다른 유희가 발견되면 곧 독서를 포기한다. 그들에게 책을 통한 변화란 일어나지 않는다. 고민하거나 타자와 책을 매개로 대화하지 않는다. 반면, 소수의 독자가 있다. 문학에 우선적으로 반응하며, 어떤 책은 평생을 거쳐 거듭 읽는다. 고요한 시간을 찾아 책에 몰입한다. 의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루이스는 재차 강조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제대로, 그리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자아의 확장이며 진정한 모험이다. 

내일 청어람에선, 루이스 이야기로 마무리해야겠다.



_화해는 불편하고 평화는 아득하다. 화해와 평화, 이처럼 절실한 것들이 또 있을까. 하지만 우린 이 단어들을 한껏 남용하며 살되, 그 절실함에 아파하거나 조바심 내지 않는다. 절실함은 일상이되, 우리의 일상은 기꺼이 망각을 선택한다. 원제는 "Reconciling All Things"이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성서가 그것을 꿈꾸지 않았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비전이었을 것이다. 하여 저자는, 이 아득한 비전을 향한 순례의 길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속도를 늦춤으로써 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25쪽)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역설적으로 우리의 불가능한 꿈은 그것에 달려 있다. 


평화는 아득하고 화해는 불편하다. 더욱이 제자도라니. 이런 책이 많이 팔리는 세상은, 그래도 희망이 있겠다. 

이 책은 미국 IVP와 듀크대학교가 펴내는 평화 시리즈로, 국내에 먼저 번역 출간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장 바니에, 스텐리 하우어워스/IVP), <약한자의 친구>(크리스틴 폴, 크리스토퍼 휴어츠/복있는사람)과 더불어 읽으면 좋을 것이다. 

표지에 차용한 그림과 빛깔이 참 좋다. 현아 디자이너의 알뜰한 솜씨가 돋보인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812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