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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성취하는 사랑의 서사

Soli_ 2017. 11. 7. 17:14

진보를 성취하는 사랑의 서사 



이혼일기 –  이서희 에세이

이서희 지음, 아토포스 펴냄, 2017년 8월



이 책은 사랑과 이별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향하는 내밀하고도 불온한 연서다. 타자로부터 연유했던 여인은 사랑과 이별의 계절을 거쳐 자신에게로 귀착한다. 그러고는 다시 여행을 준비한다. 이제 비로소 타자에게로 닿을 수 있으니 삶은 다시 뜨겁고 아름답고 충만할 것이다. 무릇 생명은 계절의 관습 속에서 진보한다는 점에서, 사랑은 진보의 근거가 된다. 반복의 습속에 머무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을 뚫고 진보를 성취하는 것이 사랑, 그렇다면 이 책을 사랑의 서사로 불러도 좋다.




관능적 서사의 유혹자, 이서희 작가의 귀환


기억을 탐험하고 삶의 서사를 넘나들며 관능적이면서도 매혹적인 글쓰기로 숱한 독자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던 에세이스트 이서희의 세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첫 책 《관능적인 삶》이 과거로부터 유래했던 존재의 기필하고도 절박한 관능을 다룬다면, 두 번째 책 《유혹의 학교》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닿기 위한, 목적어에 의지하지 않는 동사의 행위로서의 사랑에 천착했다. 이번에는 작가의 삶에 운명처럼 던져진 사랑의 서사를 다룬다. 첫 책의 존재론과 두 번째 책의 당위 사이에서 부유하던 내밀한 통증의 이유가, 세 번째 책 《이혼일기》에 담겨 있다. 


“사랑은 환호와 조롱 속을 거친 풍랑처럼 헤쳐가는 일이다.”

“사랑은 그러므로 피를 흘리는 일이다. 동시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_ 본문 중에서. 


작가의 글쓰기는 아슬아슬한 성적 감각의 충만한 자극을 경유하되 결연히 존재하는 생명의 지극한 본질까지 전진한다. 그는 감각의 표층을 위태롭게, 그러나 오랜 열망을 품은 구도자의 태세로 부유한다. 관능의 문장은 필사적이고 관능의 서사는 생동하며 관능의 존재는 당신을 매혹한다. 작가는 매혹하기 위하여 고통받는 자다. 미려한 문장들로 수놓은 작가의 서사는 진실을 해명하기보다는, 다만 진실을 믿어버린다. 사랑한다는 언명은 실은 그러한 것이기에. 


“이해는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대체로 오해로 만나서 오해로 인연을 맺고 오해로 헤어진다. 진심은 결국 절실한 오해들의 부스러기 같은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진심으로 엮이는 자들은 운이 좋은 것. 이해는 인간의 몫이 아니거나, 정말 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기적 같은 것.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운명처럼 사랑하는 수밖에.” _ 본문 중에서. 

 



이별의 이야기를 나눌까요


이 책의 제목은 ‘이혼일기’이지만 섣부른 판단은 사양한다. 사랑을 꿈꾸는 자에게, 사랑을 시작하는 자에게,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지쳐가는 연인들에게, 결별의 이유가 절실한 이들에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이별 후 홀로 남은 이들에게, 홀로 통증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이에게, 한때 타자와의 관계로서 자신을 입증하려고 했던 이에게, 오롯한 자신으로 충만하기 원하는 이에게, 아픔의 연대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리하여 당신에게 필요한, 당신을 위한 책이 될 것이다. 


“사랑의 이야기가 많은 만큼 이별의 이야기도 무수하다. 사랑과 결혼의 이야기를 즐겨 묻는 것만큼 이혼의 이야기도 궁금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혼의 이야기가 필요한지 모른다. 행복보다 고통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말 못할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먼저 배운 이들의 지혜와 위안이 줄 수 있는 것은 많다.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모든 사랑이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랑의 이야기는 이별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생전의 이별이든 앞선 죽음이든 인간의 관계는 이별을 예비한다. 미리 이별에 압도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좀 더 이별에 편안하고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 _ 본문 중에서. 




나에게로, 그리고 당신에게로 


우리는 모두 타자로부터 유래하였다. 모태에의 열망, 부성(父性) 사회의 습속은 우리를 때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로 옭아맨다. 작가는 타협하고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도망하여 부유하는 자가 되고자 했다. 낯선 언어의 땅으로, 영화라는 비현실의 세계 속으로. 벼락같은 사랑이 구원처럼 보였다.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감행하고 보석 같은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눈부시게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 자들은 우울을 감기처럼 앓는다. 벼락같은 사랑이 극진한 좋아함으로 진화하지 못할 때, 사랑의 신화는 고통의 이유로 전락한다. “사랑하면서 발견한 한 사람의 진실은, 헤어지면서 알게 된 진실 속에서 무참해진다.” 작가는 이혼의 시간들을 기록한다. 진실은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다. 진실을 직면하기 위해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벗어버리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귀착해야 한다. 


작가가 이혼 과정 속에서 두 딸과 나눈 대화는 유쾌하면서도 애틋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혼의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작가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성장의 시간이기도 했다. 작가는 이혼 과정을 딸들과 공유하고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한다. 딸들이 아빠와 엄마의 집을 오가야 했지만 되레 그것을 기회로 삼으라고, 그녀는 권면한다. 그렇게 그들은 삶의 동지가 되어간다. 


“삶은 응원받아 마땅한 거란다. 그래서 엄마는 삶의 연대를 통해 타인의 삶을 응원하고 또 응원을 받으려고 해. 엄마는 너희를 응원할 거야. 엄마의 삶으로, 엄마의 살아가는 재능을 너희들 앞에 펼쳐 보이면서. 그게 바로 너희들의 삶을 가장 기쁘게 응원하는 길이라고도 생각해. 그러니 나의 아이들아, 너희들도 너희들의 삶으로써 엄마의 삶을 응원해줄래? 삶을 살아가는 재능을 만개하면서 말이야. 그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말이야.” _ 본문 중에서.




우정과 연대의 자리로


특히 작가는 여성들의 연대에 관심이 많다. 정확하고 서슴없이 자신의 권리를 방어해내는 것은 모든 이혼 당사자들의 권리다. 특히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겐 생존을 위한 의례로서도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작가는 안타까워한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이후 쏟아져 나온 여성들의 고백을 들으며 함께 울었다. “나 혼자의 문제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보니 우리 모두의 경험담이라는 걸” 깨닫고 분노하고 슬퍼한다. 이제 작가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여성들의 모임을 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세계의 역사가, 우리의 사회가 우리에게 고난이었던 것만큼, 우리는 서로를 돌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_ 본문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귀착한 존재가 비로소 타자에게 닿을 수 있는 법이다. 구원은 저 너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자신을 아끼고 돌보는 일에 가장 성실한 자가 되는 것도, 관능의 사랑이 일상의 우정과 동행하기 시작하는 것도, 우정을 넘어 연대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도 그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은 넌지시, 그러나 확고하고도 담담하게 고백하고 증언하고 기록한다. 


“구원은 저 너머에서 오지 않는다. 우선은 다시 태어나서 스스로를 다시 쓰는 일에 전념할 것이다.” _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