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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에 닿은 루이스의 숙고 (뉴스앤조이, 130310)

Soli_ 2013. 3. 10. 06:04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에 닿은 루이스의 숙고

[서평] 기독교적 숙고 (C. S. 루이스 지음|양혜원 옮김|홍성사|2013)


나는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때 복음주의 운동에 심취했고 존 스토트, 버나드 램, 마크 놀, 알리스터 맥그래스, 김세윤 등의 관련 저작을 열심히 찾아 읽었으나, 언제부턴가 나의 확신은 흔들렸고 때로 좌절했다. 내가 흔들렸던 지점은, 저마다 서 있는 곳(혹은 신학적 정체성)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복음주의 담론 때문이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신학적 확신은, 복음주의란 명분을 자기 것으로 고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좌절했던 것은, 그럼에도 내가 거하였던 복음주의, 그곳에 함께한 사람들의 민낯을 직면하면서 부터였다. 그것은 또한 내 자신에 대한 좌절이기도 하였다.



나의 작가 루이스

C. S. 루이스는 20세기의 대표적 기독교 변증가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소설가이며 문학 평론가다. 그의 대표작 <순전한 기독교>를, 스무살 언저리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믿는 기독교>라는 제목의 조그만 문고판이었다. 얇은 책이었는데, 며칠을 끙끙대며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논증은 대체로 탁월했으나 맥락은 뜬금 없어 보였다. 나의 판단에, 이런 논증으로는 비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어떤 교만한 논거로 남용될 것만 같았다. 이러한 나의 의심은 아마 이 책이 쓰여진 당시 사회적 맥락과 독자 대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즉 1950년대 유럽과 북미의 사회적 맥락, 모더니즘의 몰락 즈음 루이스가 수행해야 했던 변증, 이 책이 방송 원고였다는 점, 그리고 독자 대상이 다르다는 점(독자들은 신의 존재가 입증되면 곧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좀 다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하여, 교회 말고도 선택의 여지는 많다)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곧 나의 작가가 되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보여준 (일부 비약이 있으나 대체로) 탁월한 논증, 치밀한 언변, 위트 어린 독설은 나를 매료시키기 충분했고, 그의 정본 번역서들이 하나둘씩 선보이면서 <나니아 연대기>는 물론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를 비롯한 숱한 소설들을 읽으며 난 그의 독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동한 것은 <헤아려 본 슬픔>이었다. 이 짧은 책은 가장 정직한 언어로 서술된,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탄원이자 연서였다. 아마 이 책을 읽고난 후, 루이스의 텍스트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했던 것 같다. 사랑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정말이지 루이스가 그랬다. 그를 사랑한 이후, 그의 책들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기독교적 숙고>, '순전한 기독교'를 위한 팡세

서두가 길었다. 이 책 <기독교적 숙고>가 속히 번역 출간 되기를 고대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전에, 다시 한 번 <순전한 기독교>를 읽었다. 왜냐면, 이 책 <기독교적 숙고>는 결국 '<순전한 기독교>를 위한 팡세'이기 때문이다. 스무살 언저리, 그리고 삼십 대 초반에 읽었던 <순전한 기독교>와 이번에 다시 읽은 <순전한 기독교>는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독교의 여러 분파와 저마다 고집하는 신학적 입장을 극복하는 진리의 토대, 그곳을 향한 루이스의 고집스런 논증은 곧 열정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장 극적인 근거가 담겨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기독교적 숙고>는, 루이스가 추구했던 순전한 기독교의 면모를 좀더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루이스의 글 모음집이다. 월터 후퍼는 '편집자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이 책을 소개한다. 

그는 상당히 다체롭게 '순전한' 기독교를 변호했는데, 변호가 필요한 부분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접근했다. 그는 가장 취약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변호했고, 청중에 맞게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다소 이질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이 기독교인의 '숙고'에서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했다.(325-326면)

기독교와 문학, 문화, 종교, 윤리, 허무, 주관주의, 신화, 교회음악, 시편, 종교 언어, 청원 기도, 보는 눈(관점) 등에 대한 여러 아티클이 담겨 있다. 루이스 애독자들은 이 목차만 보고도 눈치챘겠지만, 이 책은 루이스의 수많은 저작들에 대한 이해의 단초가 된다. 특히 1장 '기독교와 문학'과 2장 '기독교와 문화'는, 소설가 루이스를 보다 잘 이해하게 한다. 

루이스는 종교적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고유의 예술적 가치를 중시한다. 기독교적 원칙에 충실하더라도 예술적 가치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적 감동이 어떤 비약적 요소로 어떤 작품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다. 종교와 예술 사이에서, 그 적절한 타협점을 오래 연마된 예술적 숙고로 미학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소명이다. 

루이스는 예술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근거없는 폄하나 예술에 대한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것, 모두를 경계한다. 그는 다만, 예술적 가치를 '기독교에 조금 못 미치는', 하지만 '자연적인 가치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46면). 즉 '문화는 (기독교에 못 미치는) 최고의 가치를 담고 있는 창조'(47면)이어야 하며, 기독교적 '진리의 희미한 전조이자 모형'(48면)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여, 결국 그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영광을 돌려야 한다'(49면)고 주장한다. 부디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이 이 아티클을 충분히 읽어내길 바란다.      

그 밖에도 여러 아티클은 각기 다른 주제로 순전한 기독교의 여러 영역을 숙고한다. 루이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윤리적 이슈와 허무, 주관주의 등을 다루는 아티클도 결국 '순전한 기독교'의 신념과 닿아있다. 역사주의, 시편, 종교적 언어, 현대 신학과 성경 비평 등을 다루는 아티클은 여러 신학적 이슈를 다루며 '순전한 신학'의 가능성을 엿본다. 루이스는 간혹 자신은 '신학에 무지'하다고 전제(39면)하지만, 나의 생각에 그런 무지를 고백해야 할 사람들은 정작 신학자들일 때가 많다. 문화적, 예술적, 철학적, 사회적 맥락에서 발현된 루이스의 신학이야 말로, 신학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순전한 그리스도인을 갈망하다

루이스는 전방위적 글쓰기를 통해, 여러 영역에 대한 기독교적 숙고와 치밀한 사유를 시도한다. 그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루이스 전기에 의하면, 그는 당시 학계와 평단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허나 전방위적 관심이 이처럼 치열한 숙고로 귀결되는 것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또한 루이스의 작품들에 반응했던 수많은 대중의 환호는 아마도, '순전한 기독교'를 진지하게 숙고하되 치열하게 실천했던 그의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이스의 숙고는 순전(純全)한 기독교에 닿아 있다. 루이스의 숙고는 우리의 맹목적 신앙을 난처하게 하고, 루이스의 관대한 위트는 우리의 곧은 권위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복음주의자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로이드 존스가 말한 대로, 루이스 역시 복음주의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루이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복음주의자는 포기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도, 그처럼 숙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 

(201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