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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 김도언] 이외수 혹은 단순가담자를 위한 변명

Soli_ 2013. 1. 8. 12:51



그래도 김도언 님이 계셔서 다행이다. 설령 자신이 "이외수 집단 린치"와 상관없다고 할지라도 이 글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일 것. 

"밤하늘의 별을 보고 미지의 길을 찾을 수 있던 시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한 회고는 게오르그 루카치라는 사람이 했다. 자크 랑시에르라는, 요즘 뜨는 철학자는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라는 책에서 이런 말도 했다. 민주주의란, 자신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고. 당신 스스로 당신의 운명을 외쳐라. 우르르 몰려들어 이빨을 박아넣는 당신의 뒷모습이 얼마나 누추한지 한번 들여다보라.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야만의 언어에 가담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이다."

"부디 스스로를 아끼고 위하고 존엄하자. 그 방법은 어렵지 않다. 타자의 생각과 의견을 똑같이 아끼고 위하고 존엄하는 것이다."


http://www.facebook.com/oisooTM/posts/309485379171190




이외수


극악한 모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녀사냥 그대로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빨갱이로 변해 버린 것이나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 소설가 김도언의 명징하고도 균형잡힌 시각과 판단을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여기에 옮깁니다. 


이외수 혹은 단순가담자를 위한 변명

김도언(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지난 대선에서 트위터를 통해 특정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네티즌 일부가 그를 성토하고 나섰다. 네티즌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어떤 성향을 가졌고 어디에 정치적 호적을 두고 있는지는 두루 알려졌다. 대선 결과는 이외수 선생이 지지를 표명한 후보의 패배였는데, 승리한 후보를 지지하는 편에 섰던 이들은 마치 승자독식의 당연한 임무를 수행하듯 야만의 언어로 이외수 선생을 몰아붙였다. 그런데, 아무리 잘 봐줘도 내 눈에는 그들이 억지와 생떼의 악다구니를 퍼붓는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2012년 4월 총선 때 이외수 선생이 트위터에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렸을 때, 좌측의 극단에 있던 이들이 십자포화를 퍼붓더니 이번엔 우측의 극단에 있는 이들이 반대로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부당하게 먹잇감으로 지목되었을 때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이빨을 박아 넣고 언어의 새빨간 카니발을 벌이고는 무책임하게 뿔뿔이 흩어지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작가로서 언어의 형식과 쓰임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뭐 정신의 죽음이라는 비극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 치졸하고 졸렬한 광대의 삿대질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정신이 가진 균형 능력과 자정 능력이 이토록 허술하다는 것인가.

그들이 이외수 선생에게 폭력적인 언어의 린치를 가한 것 중에 가장 저급하고 우스운 것(저급한 것은 우스움을 면할 수 없다)이 화천군이 그에게 특혜를 줘 다목리에 조성된 감성마을에 수십 억의 국민혈세가 들어갔으니 이외수 선생이 퇴거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아방궁’이라는 표현도 썼다. 이걸 주도한 윤정훈이라는 목사, 뱀의 혀를 가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교활한 언어만 골라 썼다. 말을 그런 데 사용하다니, 참 용감하면서도 무모하다. 비유가 이토록 사특하게 쓰이는 걸 보면서, 언어가 가진 수사라는 고유한 기능 자체가 혐오스러울 정도다. 윤정훈 당신, 타락한 언어가 얼마나 저속한 영혼들을 회유하고 교란시키는지 시험하려 했다면 그 점에서는 성공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당신은 당신의 졸렬함을 훌륭하게 증명해 보였다.

윤정훈 목사가 쓴 아방궁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외수 선생을 황제로 간주하는 무의식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런데 이외수 선생이 황제인가? 그렇다면 그에겐 신민이 존재해야 하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이외수 선생이 주변 사람들에게 권위를 들이대며 충성을 강요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그가 화천군에 무얼 먼저 요구하거나 제안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가 팔로어가 되어달라고 트위터리안들에게 구걸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158만 명이라는 팔로어 숫자는, 작가로서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예의, 존중, 소통의 능력이 간명하게 수치로 드러난 것뿐이다. 나는 얼마 전 서울의 모 서점의 행사장에서 이외수 선생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을 구경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시민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더라. 특히 파릇파릇하게 자라나는 중학생 친구들과 대화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작가가 거참 신비감 없게시리, 난 이런 혼잣말도 했더랬다.

아방궁과 관련된 특혜 논란을 한번 들여다보자. 난 이제 이외수 선생에게 근거 없는 언어의 패악질을 자행한 이들을 ‘악머구리’라고 표현하겠다. 악머구리란 잘 우는 개구리라는 뜻의 우리말이다. 일단의 악머구리들이 비판의 전략으로 들이댄 화천군 토지의 소유 문제, 지원의 범위 문제에 대해서는 화천군의 군수와 담당자, 그리고 이외수 선생이 이미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감성마을이 들어선 땅은 여전히 화천군 소유이고 감성마을이 시설물 역시 화천군 소유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등기상으로 토지와 건물에 대한 권리가 이외수 선생에게 있지 않고 화천군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화천군의 정갑철 군수와 군민들은 삭막한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인구 25,000명에 불과한 오지의 향토를 어떻게 활기찬 도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 그리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디자인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을 터다.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가 각별했던 화천군수와 정책 입안자들은 이외수라는, 우리 시대 가장 폭넓게 독자 일반과 소통하는 작가를 화천으로 영입해 문화도시의 이미지를 심는 것이 낙후되고 폐쇄적인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그래서 이외수 선생에게 정중하게 제안을 했던 것이다. 작가로서 일련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겠으니, 화천에 와주시면 좋겠다. 이외수 선생은 화천군의 제안에 작가를 배려하는 진심이 느껴졌고 연고도 없는 군사도시 화천으로 이주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사실 화천군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정책적 판단이었을 뿐이고 거기에 들어간 예산 역시 합리적이고 통상적인 예산 집행이었던 거다. 그러데 그 정책과 사업이 실패했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외수의 영입 효과는 실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거 아닌가. 화천군이 겸손하게 추산을 해도 물경 100억 원대의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이외수 선생이 아니었다면 화천이라는 지명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화천에서 80년대에 혹독한 군생활을 했던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은, 화천 쪽으로는 오줌도 싸기 싫다는 말을 할 정도로 화천을 혐오했는데, 그 역시 이외수 선생으로 말미암아 지금 화천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진짜 얘기를 하고 싶다. 개인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자율성이 왜 보장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솔직히 이제 정말 지겹다. 그걸 여태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은 귓속 가득 밀봉을 한 자들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소의 귀에 어떤 경을 읽으랴. 작가적 양심과 상식을 걸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자신의 권리와 권한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의 그것을 똑같이 존중하는 것이란 것. 그것이 출발이고 시작이고 전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혹여나 악머구리의 집단 환각에 빠져 이외수 선생에 대한 언어의 폭력행위에 가담했던 이가 있다면, 내 말을 진심으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일단 나는 당신이 단순가담자라고 간주하겠다. 당신은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단독적 존재다. 당신의 정신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밝은 달을 뚜렷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눈의 지향을 사랑한다. 하지만 당신의 귀에 들리는 불온한 선동과 데마고그의 유혹이 당신의 눈동자를 흐리게 해 달이 아닌 손가락 끝을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당신이 야만의 언어에 휘둘릴 때, 가장 고통당하는 것은, 당신이 욕설을 하고 언어의 삿대질을 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바로 당신 자신이기도 하다. 당신은 그 순간 당신의 주체적 정신과 고귀한 영혼을 스스로 살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정신과 영혼을 얼마나 모독하고 있는지를. 당신은 당신의 고유한 정신과 사고를 가지고 당신의 언어로 당신이 바라본 달 혹은 별의 운동을 표현해야 한다. 그 정신의 힘이 인간의 이성과 사유와 창의력의 찬미되어야 하는 토대를 만들어준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미지의 길을 찾을 수 있던 시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한 회고는 게오르그 루카치라는 사람이 했다. 자크 랑시에르라는, 요즘 뜨는 철학자는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라는 책에서 이런 말도 했다. 민주주의란, 자신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고. 당신 스스로 당신의 운명을 외쳐라. 우르르 몰려들어 이빨을 박아넣는 당신의 뒷모습이 얼마나 누추한지 한번 들여다보라.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야만의 언어에 가담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이다. 이외수 선생은 화천군민에게는, 그리고 그와의 소통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수 많은 이들에게는 밤하늘의 별 같은 사람이다. 그 별에 침을 뱉는다 한들, 침은 당신의 이마만 더럽힐 뿐이다. 부디 스스로를 아끼고 위하고 존엄하자. 그 방법은 어렵지 않다. 타자의 생각과 의견을 똑같이 아끼고 위하고 존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