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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시고, 포기하는 걸 두려워하시길

Soli_ 2012. 12. 23. 02:14

[김연수] 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시고, 포기하는 걸 두려워하시길

http://yeonsukim.tumblr.com/post/3837115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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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5월 어느 날, 저는 신문을 읽다가 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기사에는 “15일 오후 3시 40분 서울 중구 명동성당 구내 가톨릭교육관 3층 옥상에서 조성만(24. 세례명 요셉. 서울대 화학과 2년. 가톨릭민속연구 회장)씨가 칼로 배를 찌르고 12m 아래로 투신, 가까운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7시 20분께 숨졌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천문학과에 진학해서 우주론을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매일 야간자습을 하던 제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그는 내가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던 인생을 나보다 먼저 살아가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모든 소망과 기대와 꿈과 희망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뛰어내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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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해 겨울, 저는 서울의 한 대학에 가서 학력고사를 치렀습니다. 그때만 해도 수험생들은 장차 자신들이 공부하게 될 그 학교, 그 강의실에 가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전날 서울에 올라와 여관에서 잠을 잔 뒤, 시험을 치려고 그 학교까지 갔습니다. 대입 입시가 치러지는 날이면 으레 그렇듯 몹시 추운 날이기도 했지만, 또 그와는 다른 이유로 몸이 떨렸습니다. 내가 원하던 미래가 손을 내밀면 닿을 만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죠.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꿈의 풍경은 시험을 치르는 내내 저를 마비시켰습니다. 수험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은, 열아홉 살의 저는 간절히 원하고 최선을 다 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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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제가 지금 살아가는 이 우주로 들어온 것도 바로 그 해 1988년의 일이네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좀 어둡고 축축하고 끈적끈적하고, 뭐, 암튼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살아보니 맞더군요. 여기서는 안 되는 일은 절대로 이뤄지지 않아요. 제 아무리 간절히 원하고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지만, 이따위 빌어먹을 우주에서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늙는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감히 예언하건대 우리가 죽을 때까지도 바뀌는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아프니까 청춘이었다가 아프니까 중년이었다가 아프니까 말년이었다가 아프니까, 결국 우리는 죽을 거예요. 그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참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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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어떤 모양일까? 원래 그게 궁금해서 천문학과에 가고 싶었죠. 하지만 이젠 알겠어요. 우주에도 얼굴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우는 듯 웃는 듯 그런 얼굴일 거예요. 왜 그런 얼굴 있잖아요. 기기묘묘한 얼굴. 너무 과장되게 슬퍼하고, 너무 과장되게 기뻐하면 보이는 그런 얼굴. 이 따위 빌어먹을 우주에서나 살아가야만 하는 불쌍한 처지의 우주인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그런 얼굴. 우리의 얼굴. 그러니까 원하던 미래가 손을 내밀면 닿을 만한 곳에 있던 시험장에서 2교시 수학시험을 치르고 난 뒤,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열아홉 살의 제가 지었을 법한 얼굴 말입니다. 그렇게 제가 소망했던 미래는 제게 가까이 왔다가 영영 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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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이 되자, 더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학생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저는 이제 매우 우스운 성적으로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려고 휴학계를 낸 상태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조성만 씨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철학서를, 사회과학서를, 소설을, 시집을 닥치는대로 읽어도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소망과 꿈과 희망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그 일련의 죽음들 앞에서 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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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많은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이, 우리가 술자리를 마칠 때마다 그의 시를 노래했던 시인이, 늘 로만칼라의 사제복을 입던 대학총장이 말했습니다. 거기에는 죽음의 리스트가 있다고. 그들은 어떤 세력의 목적에 따라 아무런 의지 없이 죽어간 인간들에 불과하다고. 열아홉 살, 제 의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불온세력의 꼬임에 빠졌기 때문에. 그 말을 믿자니, 제 자신이, 우리가, 인간이 너무나 한심하고 불쌍했습니다. 가뜩이나 이따위 빌어먹을 우주에서 살아가는데,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자들, 힘없고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은 죽음마저도 다른 목적의 도구일 뿐이라니. 그 대답에 저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열일곱 권인가, 열여덟 권인가 이젠 저도 알지 못하는 숫자의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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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미 1991년 5월의 죽음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서 소설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읽어본 사람들은 의아하겠지만, 그게 바로 저의 데뷔작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입니다. 이따위 빌어먹을 우주에 대한 실망 반에다가 골치아픈 문제 앞에서 대충 얼버무리고 싶은 마음 반이 서로 뒤섞인 희한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05년 무렵, 제 나이 또래 두 명의 사람을 다른 자리에서 각각 만날 수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 끝에선가 두 사람 모두 1991년 5월에 겪은 체험을 말하다가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울음으로 좌중은 갑자기 침울해졌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삼십 대 중반이었습니다. 느닷없는 울음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눈물에 대해서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분위기를 돌렸습니다. 그때 저는 두 사람에게서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우는 듯 웃는 듯, 그 얼굴 말이죠. 제가 생각하는 이 우주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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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겠죠.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소설을 쓰다보면 소설이 저를 쓴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재를 끝마칠 무렵, 저만큼 많이 쓴 건 아니지만 그 소설도 제 영혼에 뭔가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냐면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건 저보다 먼저 살았고, 저보다 먼저 소설을 썼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설에 무수히 남겨놓은 바로 그 문장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의 길을 갈 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에 대해서 한 번 더 말할 때, 이 우주는 달라진다는 말.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맨 앞장에 인용한 요한복음 12장 24절의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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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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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펴내면서 저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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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른다, 라고 해야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이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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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씌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대답하기 위해서 저는 평생 소설을 써야만 하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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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노력 역시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제가 쓰는 소설의 결말은 모두 여기까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새드엔딩입니다. 뭔가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정말 느닷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마치 기적처럼 바뀐 세상을 봅니다. 하지만 그건 절대 느닷없지도 않고, 기적도 아닙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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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절망을, 오해를, 불행을, 무엇보다도 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두려워해야하는 건 냉소와 포기입니다.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