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되고 낭비하여 아름다운,
유혹으로의 초대
《유혹의 학교》(이서희 지음┃한겨레출판 펴냄┃2016년 5월)
손쉬운 사랑은 없다. 다른 존재를 향한 열망이 발화되는 것은 순간이나 그 존재에 닿을 때까지는 고독의 시간을 앓아야 한다(고독이 소중하다면 그것은 존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심연은 견고하므로, 더욱이 다른 존재라면, 내 고독의 보상을 그에게 쉬이 기대할 수 없다. 천운이 도래하여 열망하던 존재와 연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지금부터의 시간들로 치열하게 증명되어야 하니까.
세상에 손쉬운 사랑은 없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랑도 없다. 포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떤 큰 물살로도 그대의 사랑을 끄거나 쓸어가지 못하리.”(아가서 8장 7절) 사랑은 모든 존재가 숙명처럼 앓는 천질天疾과도 같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기꺼이 통증을 감수한다. 그 숙명을 외면하거나 강탈하는 자는 고립된다. 타인과 자신으로부터 영원히 고립될 천형天刑에 처할 것이다.
여기 ‘유혹의 학교’가 있다. 존재의 고독을 견디고 그 심연을 건너고자 하는 이들, 사랑의 열병을 제대로 감당하고자 하는 이들, 지금부터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학교다. 구원의 단서들이, 그것도 매혹적인 선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므로 당분간 안심해도 좋다.
유혹은 상대의 매력은 물론 자신을 발견하고 탐험하는 수업이다. 오랜 편견으로 자리 잡은, 추락과 파멸이란 유혹의 수업료는 치르지 않아도 좋다.(《유혹의 학교》, 19쪽)
선생은 두 부류다. 꼰대와 매혹하는 자. 꼰대는 도그마를, 매혹하는 자는 이야기를 질료로 삼는다. 도그마는 이미 구원받은 자의 존재 증명에 가깝다. 도그마가 아니라 서사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의 선생은 매혹하는 자다. 조곤조곤하고도 분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서사를 들려준다. 그녀와 ‘그’들(‘그들’이 아니다), 사랑과 사랑, 사랑과 우정, 사랑과 이별의 서사를 대화와 독백의 어법으로 들려준다. 첫여름의 빛깔을 가진 서사가 이른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매혹당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 장맛비를 흠뻑 맞는다.
그러나 서둘지 말라. 매혹당한 자는 질주하기 쉬우므로, 사랑에 대한 다부진 각오로 우리의 조바심을 다독이며 속도를 늦춰야 한다. 매혹의 서사는 간단히 요약되지 않는다. 특히 리듬을 주목하라. 멈춰 서서 음미해야 할 문장들 앞에선 기꺼이 그리 해야 한다. 단숨에 읽고 소화할 수 없는 책이므로, 곁에 두고 숙고해야 한다. ‘유혹의 학교’는 우리의 세상 전체를 현장으로 삼고 있으니 가야 할 길은 아득하다.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는 온갖 자기계발서들은, 관계의 정복을 목표로 삼거나 타인을 나의 편으로 회유하여 성공을 도모한다. 우정과 사랑은 기껏 기술에 머문다. 그러나 이 책은 존재와 존재의 간극을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유혹은 관찰에서부터 시작”(31쪽)되며, “자신을 드러내는 속도가 상대를 발견하는 속도보다 앞서지 않”(39쪽)아야 한다. 결국 “타자성의 발견”(56쪽)이다. “구체적 존재로서 상대를 발견하고 탐색하고 알아가는 것. 그것이 유혹의 유일한 모럴”(206쪽)인 까닭이다.
관찰에서부터 발견하기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감정이 아니라 감수성이다. 통념이 아니라 통찰이다. 그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한 사람은, “선택의 특별함을 묻는” 대신 “실천의 특별함”을 묻는다(280쪽). 그다음에야 기술이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혹의 기술은 그동안 심각하게 오해되었다. 유혹이라는 지난한 실천을 성찰하는 대신, 쉬운 방식의 정복을 도모하는 세상이다. 권력과 완력을 동원하고, 재화의 지불로 다른 존재를 정복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리고 폭력은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
난입 혹은 재화로 착취하는 매혹은 종국에 쌍방 모두의 존엄을 파괴하고 타인에게 다가서고 다가오는 길을 손상시킨다.(66쪽)
이 나라에서 여성은 모욕당하는 존재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 ‘좋은 여자’라는 통념의 습속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거세한 채 남성의 욕망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나를 유혹하였으니 너를 정복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약탈자의 주장이 법의 논리로 수용되는 야만의 사회다. ‘유혹의 학교’가 간혹 결연해지는 이유는 이 세상 때문이다. ‘유혹의 학교’를 통해 유혹하는 자의 모럴과 유혹당한 자의 성찰에 도달한 남성은 자못 깊은 죄책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유혹의 학교’는 성급하게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목적어에 의존하지 않는 동사의 행위다. “사랑은 유혹과 함께 길을 찾고 몸과 함께 깊어”(190쪽)지겠지만, 그럼에도 구원은 한 존재와의 사랑으로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구속하는 사랑의 낭만이 아니라, 상실과 애도의 과정까지도 기꺼이 수렴하는 사랑의 결심을 요구한다. “살아가는 일은 도처에 굳은살을 키워가는 일”(335쪽)이라는 고백은, 사랑하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의 선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고 차마 회피할 수 없는 또렷하고도 명징한 시선을 우리에게로 향한다. 이제 당신의 서사를 들려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짐짓 당혹스러움은 감춘 채 우선 그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하나의 약속처럼 곱씹을 것이다. 구원은 결코 계산으로는 이를 수 없으며, 유혹은 오직 남김없이 무너지고 낭비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 거기서부터 내 서사도 시작될 것이므로.
“설령 공중누각을 쌓아 올렸다고 해도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곳이 누각이 있어야 할 곳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구절을 읽은 것은 그 여름을 보낸 후 수년이 흐른 뒤였다. “이제 누각 아래로 기초를 쌓아올릴 때”라는 다음 구절보다는 누각이 있어야 할 자리는 공중이라는 말에 머물렀다. 여전히 나는 남김없이 무너지고 낭비되는 것의 아름다움에 설득된다. 유혹은 낭비되는 아름다움이다. 혹은 낭비되고 낭비하여 아름답다.(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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