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상황 22

다시, 책의 희망을 묻다(‘연재’의 맺음말, 혹은 ‘그럼에도 책 읽기’의 서문)

"복음과상황"에 2013년 2월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모두 20편의 서평을 통해 28권의 책을 소개했습니다. 중간에 바쁘다는 핑계로 두 달에 한 번 연재로 바꾼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였고, 글을 쓸 마음의 여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지요(바쁘다는 것과 삶의 여백이 없다는 것의 상관관계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지난여름부터 연재를 그만두어야 하는 때를 생각했고, 결국 11월호가 마지막 연재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고정 연재하던 매체는 이제 없네요. 이 글은 몇몇 곳에서 했던 강의 제목이기도 했고, 모 출판사에서 제안받았던 책의 서문으로 썼던 것입니다. 원고지 50매 정도가 되는 글을 1/3로 줄인 것이지요. 그래서 부제가 "'연재'의 맺음말, 혹은 '그럼에도 책 읽기'의 서문"입니다...

‘죽음 자’의 희망 앞에 선 ‘산 자’의 절망 (복음과상황, 140913)

복음과상황(2014년 9월호)_“독서선집” ‘죽음 자’의 희망 앞에 선 ‘산 자’의 절망 ≪그의 슬픔과 기쁨≫(정혜윤 지음│후마니타스 펴냄│2014년 4월) 2009년 1월 9일, 쌍용자동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신차 개발 자금 확보를 위해 자신들의 퇴직금을 담보로 1천억 원을 출자하겠다고 했고, 임금과 복지 삭감을 받겠다고 했고, 순환 무급 휴직도 먼저 제시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하나였다. 고용을 보장해 달라는 것. 그러나 회사는 해고를 강행했다.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라고 쓴 현수막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해고자 명단에 오른 자들은 ‘죽은 자’로 불렸다. ‘죽은 자’들과, 그리고 동료들을 버리지 못해 함께 파업에 동참했던 소수의 ‘산 자’가 있었다(옥쇄파업 결행했..

희망의 ‘그날’은 없다 (복음과상황, 20140417)

복음과상황(2014년 5월호)_“독서선집” 희망의 ‘그날’은 없다 ≪“살아가겠다”≫(고병권 지음│삶창 펴냄│2014년 1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철학과 배움, 투쟁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살아가겠다”는 사유의 본질이 된다. “철학자란 자기 삶으로 철학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책에 갇힌 사유가 아니라, 길 위에서, 현장에서 입증되는 사유가 철학인 것이다. 하여, 이 책의 저자 고병권은 “길 위의 철학자”로 불린다. 책의 제목은 ≪“살아가겠다”≫이다. 따옴표가 붙은 이유는, 그것은 저자의 말이 아니라 어느 날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적혀 있던 누군가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군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겠다”를 읊조리며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고병권..

희망이란,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 (복음과상황, 140310)

복음과상황(2014년 4월호)_“독서선집” 희망이란,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 ≪사월의 미, 칠월의 솔≫(김연수 지음│문학동네 펴냄│2013년 11월) 소설가 김연수는 진실에 대한 탐구자다. 언젠가 그의 블로그에 쓴 독서일기를 모은 작은책 ≪김연수欄(란)≫이 있었는데(정식으로 출시되지는 않았다), 거기엔 이런 문장들로 가득하다. “진실이란,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말하지 못하는 부분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160쪽) “진실은 버거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진실은 거기 존재한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의 나보다 좀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180-181쪽) 내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진실에 대한..

내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이유

그의 최고의 책, 이란 수사는 함부로 쓰는 게 아니다. 최근 어떤 책을 블로그에 추천했는데 그 책의 출판사 카피가 그랬다. "그의 최고의 책". 충분히 좋은 책인 것은 분명하나 정말 그런가, 의문이다. 그의 대표작을 이미 보유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책에 그 수사를 붙인 것은 자신감인가, 무모함인가. 그 어느 쪽이라 할지라도 경솔하다는 생각이다. 그 다급한 마음이야 왜 모를까 마는. 어떤 작가의 최신작이 언제나(또는 대부분)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에 대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내겐 '소설가 김연수'가 그렇다. 그의 대표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기대한다. 그래서 이번 "복상"엔 '그의 최고의 책'이란 카피가 붙은 어떤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김연수의 소설집을 소개했다. 수년 간..

view_/책_ 2014.02.15

위태로운 경계를 걷는 이들의 위로 (복음과상황, 131210)

복음과상황(2014년 1월호)_“독서선집” 위태로운 경계를 걷는 이들의 위로 ≪다른 길이 있다≫(김두식 지음│한겨레출판 펴냄│2013년) 루쉰의 소설 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소설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에 만약 정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래도 있다면, 우선 감히 말하고, 감히 울고, 감히 노하고, 감히 욕하고, 감히 싸우며 이 저주스러운 곳에서 저주스러운 시대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이상, , 을유문화사, 2008)김두식과 ‘그의 인터뷰이’를 따라 걷는 내내,..

‘강철로 된 그 문’을 여는 사람, C. S. 루이스 (복음과상황, 131110)

복음과상황(2013년 12월호)_“독서선집” ‘강철로 된 그 문’을 여는 사람, C. S. 루이스(C. S. 루이스 지음│홍종락 옮김│홍성사 펴냄│2013년)(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홍종락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13년) 친애하는 벗 루이스, 이 글은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에 대한 답장입니다. 이 책은 월터 후퍼가 편집한 3부작에서 385통의 편지를 발췌한 것입니다. 당신의 오랜 벗이었던 아서 그리브즈, 친형 워렌 루이스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수신인이었지만, 저는 이 ‘모든’ 편지들을 당신이 저에게 쓴 편지로 읽었습니다. 예의와 품위가 깃든 여러 조언과 변증은 하나의 표상으로, 은밀함을 담보한 우정은 자긍심으로 남았습니다. 슬픔을 관조하듯 담담히 써 내려간 대목은, 벗으로서(벗이기에!) 참으로 ..

불의한 역사의 전복을 위한 시도(복음과상황, 131008)

●복음과상황 11월호_“독서선집”●복음과상황(link)에는 원고가 넘쳐 본문을 조금 들어냈습니다. 블로그엔 전문을 싣습니다. 불의한 역사의 전복을 위한 시도 (장 아메리 지음│안미현 옮김│길 펴냄│2012년) 장 아메리의 본명은 한스 차임 마이어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한 유대인으로,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벨기에로 이민갔다. 이후 반나치즘을 위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43년 7월 체포되었고,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등의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5년 종전과 함께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체포된 유대인 2만5000여 명 중 겨우 615명이 살아 남았으며, 아메리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한 사람 때문에, 엄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 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죽..

우리에게도 ‘순례’가 필요하다 (복음과상황, 130905)

복음과상황(2013년 10월호)_“독서선집” 우리에게도 ‘순례’가 필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억관 옮김│민음사 펴냄│2013년) “기차역”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철도회사에서 역사(驛舍) 설계를 한다. ‘쓰쿠루(作)’라는 이름은 ‘만들다’라는 뜻을 가졌다. 공사를 담당한 역의 어딘가에 늘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십대 시절부터 그는 시종일관 기차역에 매료되었다. 역사가 없다면 기차는 멈출 수 없다. 기차가 플랫폼에 멈춰 서면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찾아 빠져나간다. 쓰쿠루는 기차역을 만드는 사람이다. “5” 다섯 명은 나고야의 한 고등학교 같은 반으로 만났다. 여름 봉사활동을 하다가 친해졌는데, 그들은 제각기 ‘나는 지금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친구를 만났다’고 ..

‘정의와 샬롬’에 헌신한 ‘그을린 예술’의 길 (복음과상황, 130805)

복음과상황(2013년 9월호)_“독서선집” ‘정의와 샬롬’에 헌신한 ‘그을린 예술’의 길(심보선 지음│민음사 펴냄│2013년)(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신국원 옮김│IVP 펴냄│2010년) 일흔이 되기 전까지 까막눈이었다. 뒤늦게 글을 배워 시를 쓰기 시작한 할머니는 이제 여든살이다. 이제는 한낮에도 시상이 자꾸 떠올라 밭일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다. 예술이란 “작품의 제작인 동시에 삶의 제작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한 몰두가 자아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사회질서가 자기에게 부과한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모험”이기도 하다. 어떤 예술은 비루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 되고 모험이 된다. 심보선 시인은 이를 ‘그을린 예술’이라 명명한다.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