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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그날’은 없다 (복음과상황, 20140417)

Soli_ 2014. 4. 30. 23:20

복음과상황(2014년 5월호)_“독서선집”



희망의 ‘그날’은 없다 

≪“살아가겠다”≫(고병권 지음│삶창 펴냄│2014년 1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철학과 배움, 투쟁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살아가겠다”는 사유의 본질이 된다. “철학자란 자기 삶으로 철학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책에 갇힌 사유가 아니라, 길 위에서, 현장에서 입증되는 사유가 철학인 것이다. 하여, 이 책의 저자 고병권은 “길 위의 철학자”로 불린다. 책의 제목은 “살아가겠다”이다. 따옴표가 붙은 이유는, 그것은 저자의 말이 아니라 어느 날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적혀 있던 누군가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누군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겠다”를 읊조리며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고병권은 이 책에서 그 희망을 증언한다. 


희망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품는 것이지만, 미래로 갈수록 덧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실질적인 것이 된다. 희망을 내일에 거느니 오늘에 걸고, 희망을 거기에 거느니 여기에 걸겠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이 글을 쓰는 날, 나는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희망을 보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11쪽)


권력에 추방당한 말의 기록


이 책은 말의 기록이다. 대개의 책은 사유에서 출발하여 글로 귀결되지만, 어떤 책은 말에서 출발하여 글로 정착한다. 이 차이는 상당하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역동과 삶에 대한 공명共鳴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한문 농성촌에서부터 핵발전소 송전탑 투쟁 중인 밀양, 장애인들의 노들야학 등의 현장에서 행해진 저자의 강연과 쌍용차 노동자 고동민, 청년유니온 김영경, 밀양의 이계삼 선생 등과 나눈 말의 기록이 담겨 있다.


고병권이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은, 권력에 의해 삶의 현장에서 추방당한 ‘소수자’들이다. 저자는 쌍용차 노동자, 밀양의 노인들, 탈성매매 여성,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들 앞에서, ‘철학’과 ‘앎’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글의 제목은 “당신의 삶에서 당신의 철학을 본다”이다. 이 글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과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특히 디오게네스의 여러 일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배를 타고 가다가 디오게네스는 해적선을 만나 노예시장에 팔렸다. 이를 알게 된 그의 친구들이 주인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을 ‘바보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사자는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이들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오히려 먹이를 주는 자들이야말로 사자의 자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포란 노예의 표시이지만 야수는 사람들을 오히려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44쪽)


디오게네스는 노예가 되었지만 스스로를 ‘사자’로 여겼다. 고병권은 이렇게 해설한다. 대중이 그저 ‘양떼’라면 그들은 ‘좋은 목자’를 만났을 때조차 위험하다. 하지만 대중이 ‘양’이 아니라 ‘사자’라면 상황은 반대다. 목자가 양을 키우는 이유는 잡아먹기 위해서이지만, 사자가 두려워 먹이를 주는 것이다. 대중이 강한 존재라면 권력자들은 대중을 두려워할 것이다. 결국 고병권은 철학을 통해 스스로 강한 존재가 되는 길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길에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굽힘 없이 말할 용기”(40쪽)를 갖는 것. 다른 하나는 “자기 삶을 잘 가꾸고 그 속에서 또한 타인에 대한 돌봄을 깨닫는 것”(45쪽)이다. 용기와 연대가 우리를 강한 존재로 만든다. 


무엇보다, 포기에 맞서는 일


두 번째 글의 제목은 “대학의 앎은 우리의 삶을 구원할 것인가”이다. ‘앎’과 ‘배움’은 오늘날의 대학에서 좌초되었다. 도리어 저자는 대학 바깥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부 현장에서 저자는 그 확연한 차이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이는 ‘앎을 참조하는 앎’과 ‘삶을 참조하는 앎’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은 강의를 들을 때, 책이나 다른 강의에서 얻은 ‘앎’을 참조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참조한다는 것이다. ‘앎’이 ‘삶’을 참조할 때, 공부는 삶으로 확장된다. ‘다른 삶’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삶의 다른 방식을 창안하는 것은 권력과 자본에 대한 중요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용산의 카페 레아, 홍대 두리반, 밀양의 움막 등은 그것의 좋은 예다. 


특히 저자는 배움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곳, 20년간 장애인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노들야학에서의 강연에서 ‘배움’과 ‘앎’의 단초를 말한다. 장애란 삶의 여러 영역에서 경험하는 어떤 불가능성이다. 어떤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할 수 없음’, 즉 장애를 경험한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무능’과 ‘포기’는 장애의 보편적 정서다. “장애인이 장애라는 범주에 완전히 갇혀버리는 것은 ‘무능’을 자기에게 돌리고 그런 자기를 ‘포기’할 때이다.”(95쪽) 노들야학은 그런 장애에 대한 통념에 도전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우리가 바보가 되는 것은 지능이 모자랄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라고 말했다. ‘배움’과 ‘앎’은 무엇인가. 그것은 ‘포기에 맞서는 것’이다.


권력에 의해 삶의 현장에서 추방당한 ‘소수자’들은 비단 장애인들과 일부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쌍용차, 밀양, 강정마을, 두리반의 고통은 자칫 보편적 가능성으로 비약할 수 있다. 고난주간에 세월호는 침몰했고, 부활주일의 아침에 무슨 말로 기도해야 할지 몰라 허망했다. 늦은 마감의 변은 수십 가지이나, 무엇보다 무력감 때문이다. 기독교인이라서, 부인할 수 없는 신의 존재 앞에, 그의 전능함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만약 우리에게 아직 소명이 있다면, ‘그날’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그들을 지옥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들은 거기서 작은 천국을 만들어내면서 싸웠다.(10쪽)

희망의 ‘그날’은 없다. 다만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오늘’이 있을 뿐이다.(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