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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된 그 문’을 여는 사람, C. S. 루이스 (복음과상황, 131110)

Soli_ 2013. 12. 7. 15:12

복음과상황(2013년 12월호)_“독서선집”



‘강철로 된 그 문’을 여는 사람, C. S. 루이스

<당신의 벗, 루이스>(C. S. 루이스 지음│홍종락 옮김│홍성사 펴냄│2013년)

<C. S. 루이스>(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홍종락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13년)



친애하는 벗 루이스,


이 글은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당신의 벗, 루이스>에 대한 답장입니다. 이 책은 월터 후퍼가 편집한 <The Collected Letter of C. S. Lewis> 3부작에서 385통의 편지를 발췌한 것입니다. 당신의 오랜 벗이었던 아서 그리브즈, 친형 워렌 루이스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수신인이었지만, 저는 이 ‘모든’ 편지들을 당신이 저에게 쓴 편지로 읽었습니다. 예의와 품위가 깃든 여러 조언과 변증은 하나의 표상으로, 은밀함을 담보한 우정은 자긍심으로 남았습니다. 슬픔을 관조하듯 담담히 써 내려간 대목은, 벗으로서(벗이기에!) 참으로 아프게 읽었습니다. ‘진실한 벗’에 대한 최선의 찬사로서 ‘편지’라는 장르는 독보적입니다. 하여, 저도 서평이 아닌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는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이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그 문을 여는 것은 결국 ‘옳은’ 이야기가 아니라, ‘좋은’ 이야기라고. 세상의 이치를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을 허물 수 있는 것은, 그들 가슴의 틈새에서 비약하는(또는 추락하는) 감동(또는 슬픔)입니다. 욕심내어 한가지만 덧붙이면, ‘옳은’ 길을 걷는 이들의 ‘좋은’ 이야기가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강철로 된 그 문’을 여는 사람, 당신에 대한 저의 오랜 생각입니다. 당신은 한때 ‘강철로 된 그 문’을 가진 사람이었고, 평생 ‘숱한 루이스’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서거 5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된 기념비적 전기 <C. S. 루이스>를 쓴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당신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초로 ‘기쁨(Joy)’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어떤 ‘강렬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불현듯 나타나 바람 같이 사라지는, 그러나 가슴에 남아 열망의 상흔을 남기는…. ‘꽃이 핀 까치밥나무 덤불’ 향기를 맡으며 어린 시절 살던 ‘옛집’을 떠올리던 그때, 베아트릭스 포터의 <다람쥐 넛킨>을 읽던 어느 날,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시를 읽던 경탄의 순간… 당신은 “어떤 것을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충족되지 않는 갈망, 만족감보다 그 갈망 자체를 더 갈망하게 만드는 갈망”이었고, 당신은 그것을 ‘기쁨’으로 불렀지요. 


우리들은 저마다 그런 갈망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갈망이 충족되는 순간을 조우하되, 인생의 중심으로 맞이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기실, 기쁨은 우리네 인생에서 흔히 않은 테마입니다. 당신도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맥그래스는 당신과 무어 부인과의 ‘미스터리한 관계’를 추측하며, 그 원인을 당신이 어렸을 적 잃은 어머니에 대한 갈망에서 찾습니다. 당신이 1920년 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성>이란 소네트의 한 대목, “내게 ‘처녀이자 어머니’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인용하며, 그런 심증을 굳히고 있습니다(혹시 기분이 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맥그래스에 거의 설득당했습니다).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런 까닭에 당신은 상상력으로 충만했지만 슬픔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신은 대단히 합리적인 ‘대중적 리얼리스트’(popular realism)였습니다. 합리적 논증은 학문의 영역뿐만이 아닌 세상과 삶에 대한 당신의 일관된 태도였지요(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그 태도를 유지하셨지요. 전 그 점이 매우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견고한 ‘강철 문’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 당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문학의 아우라에 깃든 기독교의 빛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중세 문학들 속에서 현대성이 잃어버린 그 무엇, 당신이 갈망한 그 무엇이 있다고 믿었습니다(맥그래스, <C. S. 루이스>, 184-185쪽). 세계대전의 상처들이 극적으로 회복될 그 무엇, 분열된 세상의 통합을 위한 단초, 그리고 ‘이성과 상상력의 화해’에 대한 당신의 질문이 마침내 보편 타당한 진리로서의 ‘순전한 기독교’에 닿은 것이지요.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루이스는 체스판 비유를 들어 어떤 수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그를 몰아갔는지 설명해 나간다. … 루이스는 그것들을 자신이 둔 몇 수가 아니라 자신을 상대로 둔 맞수의 몇 수로 묘사한다. <예기치 못한 기쁨>은 루이스가 하나님을 발견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참을성 있게 루이스에게 다가간 이야기다.(<C. S. 루이스>, 185쪽) 


한때 “기독교를 받아들일까”를 물었다면, 이제는 기독교가 나를 받아 줄지 지켜보고 있다고 말일세.(<당신의 벗, 루이스>, 26쪽)


결국 당신을 허문 것은, ‘참된 신화’였습니다. 수많은 신화의 모태가 된 원형으로서의 이야기, 말입니다. 무엇보다 톨킨과의 우정이 당신의 ‘강철 문’ 빗장을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톨킨은 ‘신화는 근본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이야기, 세상의 근본적인 구조를 알리는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에 근거하여, ‘이성적’ 신앙이 갈망과 상상력과 통합하게 된 것이지요(맥그래스, 205쪽). 파스칼은 “종교적 신념이 옳은 것이라고 사람을 설득하는 시도는 부질없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견고한 ‘강철 문’을 무너뜨린 ‘좋은 이야기’는, 당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테제가 됩니다. ‘나니아의 창조자’ 루이스의 이야기가 또 다른 사람들의 견고한 문을 여는 것이지요. 그 수혜자 중에 저도 있답니다.  

상상력은 누군가를 향한 선물로 발휘될 때 가장 값지다



당신이 ‘별난 천재’였는지는, 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에 대한 침묵, 여성과 결혼에 관한 태도, 신학적 견해 등의 차이는 간혹 불편하게 읽히지만, 그것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벗에게 그런 차이는 사사로운 토론 주제로 족하니까요. 


무엇보다 당신으로 인해, 상상력은 누군가를 향한 선물로 발휘될 때 가장 값지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정성껏, 때로 고통스럽게 썼던 저 수많은 편지들에 담긴 순전함이, 당신을 벗으로 기억하게 합니다. 순전함은 오직 성실함으로 증거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변함없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추구했던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벗으로서 당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벗, 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