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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에로티시즘의 계절이 왔다 (복음과상황, 130503)

Soli_ 2013. 6. 1. 15:25

복음과상황(2013년 6월호)_“독서선집”



황홀한 에로티시즘의 계절이 왔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차정식 지음│꽃자리│2013)



성서를 읽으며 가장 난감했던 것은 어김없이 아가서였다. 노골적이고 관능적인 언어들은 과감했다. 텍스트에 당황해서 펴든 주석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알레고리, 훗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에 대한 예표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해설했다. 텍스트에서 한껏 자극받은 충만한 설렘은, 그만 한풀 꺾이고 만다. 그런데 요즘, 신학적 인문학의 통전적 맥락에서 생동하고 약진하는 언어로 나를 흥분시키는 신학자 차정식은, 그런 주석들을 ‘아가에 대한 산만한 말들’이란 표현으로 제압한다. 최근 출간된 그의 <성서의 에로티시즘>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외람되고 위태롭다. 성서를 둘러싼 전통의 금기와 세속적 욕망의 은밀함은, 이 책의 도처에서 탄로나거나 새로운 통찰로 대체된다. 저자의 육감적 언어는 황홀하며, 간혹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탐한다. 저자의 도발은, 가히 그 자체로 에로티시즘적 탐사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히브리 서사와 헬라적 신화 전승에서의 에로스 개념의 차이부터 살핀다. 먼저 플라톤이 기록한 에로스 신화는 '태초에 자웅동체로 존재했던 인간을 제우스신이 반으로 갈라놓았다'. 절반으로 갈라진 인간의 한쪽은 남성으로, 다른 한쪽은 여성으로 분립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인간은 상실한 반쪽을 갈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헬라적 맥락에서 에로스의 정점은 곧 결핍의 극복, 충만의 완성'이다.


이에 반해 성서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흙을 취해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람 '아담'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처하는 아담을 보시고, 그를 돕는 짝 '하와'를 지어주었다. '아담이 결핍된 존재라서가 아니라 홀몸이라는 이유가 또 다른 인간 창조의 사유'였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보다 소중한 존재로 서로를 마음껏 탐했을 것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예찬과 감탄의 언어에 묻어나는 에로스의 향연은, 다분히 존재론적이다. 사랑하는 둘은 한 몸을 이룬다. 남자와 여자는 '낯선 타자 속에서 익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익숙한 타사 속의 나를 낯설게' 수용한다.

  

유대계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애무'의 개념 속에 조형한 대로,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성적인 교감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나아가 서로의 몸을 더듬고 느끼며 뭔가를 탐색하는 교호 작용을 통해, 거기서 토해내는 신음과 탄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영원하지 않고 결국 죽음을 향해 퇴락해간다는 감추어진 진리를 서서히 예감한다. 그것을 신비로 느끼며 '타자화 된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 곧 '애무'인 것이다.(23쪽)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의 몸짓인 '애무'는, 그 절정의 순간 성기의 합일을 도모한다. 하지만 그 절정은 곧 '공허한 욕망의 허구렁'을 직면한다.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에로스의 숙고가 뒤따른다. 에로스의 욕망을 온갖 금기에서 해방시키되, 타자를 향한 갈망과 자아에 대한 겸손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인문학적 성찰을 다지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목표일 것이다.


왜곡된 에로스의 통념 너머


이 책은 성서에 기록된 에로스 서사를 뒤따르며, 왜곡된 통념을 깨뜨린다. 근친상간, 천박한 매음, 경계를 넘는 탐욕적 에로스 등으로 대표되는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와 굴절된 욕망의 에로티시즘을 극복할 대상으로 산정한다. 


또한 저자는 전통적 해석사에서 오랜 통념으로 자리잡은 금기에도 도전한다.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적 에로티시즘이 있는 것이지, 에로티시즘 그 자체로 천박한 것이 아니다. 허락되지 않은 존재를 탐하는 굴절된 욕망의 에로티시즘이 있는 것이지, 욕망 그 자체는 우리 존재의 태고적 갈망에 가깝다. 저자는 이 책을 기술하는 언어의 방식부터, 에로티시즘적 미학의 절정에 도달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금욕의 대상이었던 에로티시즘적 언어를 해방시키고, 금기의 영역에 도전하여 충만한 해석의 지평을 연다.  


에로티시즘은 다분히 욕체적인 합일을 추구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룻과 보아스의 곡진한 서사는, 남녀간의 뜨겁고 충만한 에로티시즘을 전제하고 있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당대의 관습을 아우르되 시대의 소명까지 조망하는 데까지 전진한다. 늙은 다윗의 몸종으로 침상을 지켰던 아비삭의 에로틱한 육체는, 끝내 경계의 탐욕을 견지하며 격조있는 침묵으로 '동정녀의 존재 미학'을 사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로티시즘의 절정은 예수와 '값비싼 향유(香油)'를 바친 한 여인과의 서사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여인의 에로티시즘적 갈망과 헌신을 향유(享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할 것을 선언한다. 예수와 여인의 합일은, 사회정의에 대한 피상적 통념이나 엄숙하고 상투적인 에로티시즘을 극복하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정점을 보여준다.


에로스의 핵심은 무엇보다 합일의 정념을 지향한다. 에로티시즘은 그 합일을 훼방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이르는 모든 부정적 스캔들을 혁파하는 해체의 에너지다.(250쪽)


저자 차정식은 성서적 본질과 인류의 실존적 현상의 간극에서 바특한 탐구를 수행한다. 본질에 근거하지 아니한 전통과 통념들은 그 앞에서 처참하다.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은 결국 허물어지고 합치의 지경에 이른다.


'그 매개는 대체로 몸'이나,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더 크고 더 깊은 사유까지 탐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저자로 인해, 성서의 황홀한 에로티시즘을 열망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태초의 에로티시즘을 형상화한 듯 하다. 서로의 존재를 마음껏 탐하고 충만한 합일에 이르렀던 아담과 하와의 에로스 서사일 것이다. 그 에로티시즘은 가장 아름다운 봄날의 화사함과 닮았다. 이제, 우리도 에로티시즘을 품고 열망하며 실행할 충만한 계절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