霓至園_/soon_

유언장

Soli_ 2012. 12. 31. 13:00

너머서교회는 해마다 송구영신 모임에 숙제가 있다. 유언장 쓰기와 새해 우리 가족의 말씀 정해가기. 너머서교회를 다닌지 3년 정도 되었는데, 송구영신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 하여 유언장도 처음 쓴다. 숙제처럼 시작했으나 사뭇 진지한, 속 깊은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의 가장 속깊은 마음이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무엇을 이루거나 소유하며 살지 못했지만,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충분히 누렸습니다. 가장 깊은 헤아림으로 늘 저를 지켜주는 순일, 가장 아름다운 순수를 가진 예지와 예서가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 세상을 떠난다면, 무엇을 더 누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거칠고 모진 세상에 그대들 곁에서 조그마한 힘도 보태드리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서러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언장을 쓰면서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지금 저의 삶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신학교를 가지 않았다면, 신학대학원을 포기하지 않고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혼이 아니라 유학을 택했으면 어떠 했을까요?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두지 않았다면 어떠 했을까요? IVP를 이리 오래 다니지 않고 나를 필요로 했던 곳으로 이직했다면, 그리고 올해 IVP를 그만 두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가끔 순일은 저에게 그렇게 물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숱한 물음의 덧없음을 아는 까닭에, 그런 후회는 기꺼이 버리며 살았습니다. 저에겐 늘 '지금'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은 늘 지금이어야 하고, 순일을, 아이들을 사랑하는 순간은 늘 지금이어야 하니까요.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도, 사람들을 섬기는 것도 늘 지금이어야 하니까요. 죽는 날까지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가장 아픈 것은 역시 어머니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셨던 막내였을 것인데, 늘 그 사랑을 무심히 받기만 했습니다. 왜 모든 아들은 어머니 앞에선 무심한 척 하는 걸까요? 직장을 잠시 떠난 지금은 특히 어머니 뵙기가 더 난처합니다. 마음 쓰며 고통스러워하실 어머니를 잘 아는 까닭입니다.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고백을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는 내일, 가까운 시간에 세상을 떠난다면, 


당분간 우리 가족을 너머서교회가 돌보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분들을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아내가 직장을 가져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만이라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내는 보기보다 강한 사람이라서 훌륭한 가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친구 택수에게, 저의 죽음을 알린다면 그는 기꺼이 저희 가족의 살 바를 궁리하고 도울 것입니다. 


순일은 저의 유일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순일은 저의 사랑을 간직하되,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살기엔 너무 험한 세상이고, 순일은 또 너무 예쁜 여인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만나는 새로운 그 사람은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아빠의 자리를 오래 비워두는 것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던 날, 스크랩한 신문이며 잡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스크랩한 파일을 주었으면 합니다. “너희가 태어나던 날의 세상 모습이란다. 그날을 우린 이렇게 기억하고자 했단다. 너희들의 세상은 너희들 때문에 더욱 아름다웠으면 좋겠구나.”라고 격려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고등학생이 되는 날에, 필름카메라 ‘니콘 FM2’는 예지에게, ‘펜탁스 MX’는 예서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아빠가 물려줄 재산이 별로 없단다. 대신 평생 너의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카메라를 선물한다. 사진을 찍으며,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간직하는 법을 배우렴. 세상을 바라보는 너만의 시선과 구도를 가지렴. 외로울 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사진을 찍으렴." 무엇보다 먼저 아이들이 필름 카메라부터 배웠으면 합니다. 충분히 익힌 다음, 디지털 카메라를 배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의 꿈인 “예지원”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속상합니다. 저 없이 순일과 아이들만으로 예지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다면, 제가 가진 책들은 좋은 단체에 기증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해용 목사님의 자문을 얻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래도록 운영이 가능할 것 같은 곳을 찾으시되, 그런 곳을 찾지 못한다면 이삭이를 비롯한 너머서의 아이들에게 책을 나누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책 중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만은 남겨 두어 우리 아이들이 읽도록 해주세요.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며 힘들 때마다, ‘좋은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모든 소유는 아내 순일의 것입니다. 

저 없는 세상에서 분투하고 살아갈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저 하늘 나라에 가서도 끊임없이 중보하겠습니다. 


순일, 예지, 예서, 어머니와 가족들, 안해용 목사님과 이명희 집사님, 이삭이, 오랜 친구 택수, 일터에서 벗으로 만난 양미, 수현, 그리고 미처 여기에 이름을 적지 못한 분들,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2012년 12월 31일

김진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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