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 120

불가해한 위안의 책

이소영 선생님, 간혹 우리는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세상이란 거대한 타자에 호기롭게 맞서던 소년 시절부터 부와 가난과 계급의 층위를 헤아리며 한낮의 분노로 휘몰아치던 청년 언저리를 지나, 어지간한 모순은 세상의 이치로 수렴하는 지경에 이른 지금까지, 저는 언제나 외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과 한결같은 사랑을 주는 이가 곁에 있었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고, 그 어쩔 수 없음으로 인해 저는 늘 죄인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책은 그런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듯했습니다. ‘네가 바로 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 “내가 너야. 그래서 나는 알아본단다.”(《별것 아닌 선의》, 6~7쪽) 선생님의 책을 쉽게 읽을 수 없었어요. ‘프롤로그’에 적혀 있는 저 문장 때문에, 이 책이..

편집자의 무모한 희망에 관하여

〈채널예스〉 틈입하는 편집자_ 첫 번째 편지편집자의 무모한 희망에 관하여 수현, “세상과 출판산업의 비관과 모순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랑하고 열망하여, 편집자란 업業과 편집자의 삶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이들을 초대합니다.” 새로운 지평이라니, 이런. 다시 꺼내 읽어 보니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불과 한 문장에서 비관과 모순과 절망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지평의 가능성으로 마무리되는, 한껏 경도된 선동에도 불구하고 ‘틈입하는 편집자’라는 제목의 이 강좌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4주간의 모임이 끝나고 또 다른 이들과도 비슷한 주제로 두어 차례 더 진행했으니까요. 당신과의 우정은 그때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한 출판사에 입사했다고,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후 당신이 만든 첫 번째 책을 들고 ..

‘한 길 가는 순례자’가 남긴 마지막 책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2019년 1/2월호 '2019 CTK 도서대상'에 덧붙인 글 물총새에 불이 붙듯 유진 피터슨 지음|양혜원 옮김|복있는사람 펴냄|2018년 6월 ‘한 길 가는 순례자’가 남긴 마지막 책 올해 최고의 책이라고, 유진 피터슨의 최고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개인적으로 설교집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손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성서의 진리와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명료한 논리와 탁월한 언어를 구사하는 설교의 전범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유진 피터슨이 누구인지를,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기에 그렇다. 유진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십여 권의 책을 쓴 작가였으며, 성경 원어를 오늘날의 언어로 ..

기고_/CTK_ 2019.01.14

사직서와 이력서 사이

※ 〈기획회의〉 456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직서와 이력서 사이 김진형, ‘아직은’ 생각의힘·아토포스 편집장 soli0211@gmail.com 헤아려보니 출판사에서 일한 지 십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십사 년간 세 곳의 출판사에서 일했습니다만, 컴퓨터 하드 속에 감춰두었던 사직서를 꺼내어 슬쩍 날짜를 적어보거나 이력서에 그간의 세월을 보완해놓는 일은 훨씬 잦았습니다. 사직서와 이력서를 새삼 확인해보는 일요일과 월요일 사이의 시간들은 유난히 빠르게 흘렀습니다. 거취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을 다독여 그들의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곤 했지만 정작 제 자신은 쉬이 흔들리고 무너지곤 했습니다. 노동자로서의 자괴감을 토로하는 후배들에게 저는 그들에게 쉬이 동조하기보다는 정색하며 말하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편집자는 노..

4차 산업혁명은, 없다

2017 Vol. 18호 4차 산업혁명은, 없다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 경제 혁명 100년의 회고와 인공지능 시대의 전망》로버트 J. 고든 지음, 이경남 옮김, 김두얼 감수, 생각의힘 펴냄, 2017년 7월 김진형(생각의힘 편집장)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논의가 뜨겁다. 2011년 독일 정부는 ‘인더스트리 4.0’ 정책을 추진하며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은 향후 세계가 직면할 화두로 4차 산업혁명을 제시했다. 4차 산업혁명은 로봇, 인공지능(AI), 생명과학, 빅데이터 등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말한다. 지난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은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고 새로운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직속으로 ..

기고_/etc_ 2017.11.07

사랑은 패배하지 않는다

2015년 10월 1일, 저자들에게 쓴 편지 + 책을 만드는 ‘업業’을 ‘명命’으로 받들던 시절이 있었어요. 책을 만드는 것이나 소개하는 것에 필사적이던 시절, 그러나 언제부턴가 '책이 과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란 회의에 직면하였고,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책이란 ‘명’이 하나의 ‘업’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일종의 비약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밥벌이로 전락한 책은, 그제서야 유의미한 물질의 가치로 발화한다는 것. 하나의 책에 그로 인해 희생당한 나무들의 생명값을 정확히 계산하여 묻게 되고, 하나의 책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의 삶에 대한 재화의 근원으로서 합당한지를 고민하게 하고, 하나의 책이 굳센 확신이 아니라 숱한 회의懷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을 위한 불경한 책

■〈CMR〉(기독경영연구원) 2017년 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을 위한 불경한 책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사울 알린스키 지음|정인경 옮김|생각의힘 펴냄|2016 미국의 지난 대선 정국에서 샌더스 열풍이 거세게 불었을 때,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하나의 유령이 미국을 배회하고 있다. 사울 알린스키라는 유령이.” 이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 첫 문장의 오마주다. 2015~2016년 미국 정치 혁명의 주역으로 부상했던 버니 샌더스는 무명의 아웃사이더였다. 샌더스는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면서 부의 불평등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고 ‘1퍼센트에 맞서는 99퍼센트’의 싸움을 이끌었다. ..

기고_/etc_ 2017.01.04

내가 추천한 '〈CTK〉 올해의 책'

이번에도 〈CTK〉 올해의 책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CT(Christianity Today)〉는 1956년 빌리 그레이엄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이래 현재 250만의 독자들이 구독하고 있는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대표적 매체이다. 〈CTK(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는 〈CT〉로부터 독점 제공받은 콘텐츠를 중심으로 2008년부터 한국에서 발행하고 있다. 내게도 20대 언저리에 〈CT〉를 꽤나 열심히 읽던 시절이 있었다. 〈CTK〉 올해의 책 선정절차는 다음의 절차를 밟았다. 선정위원들은 편집부로부터 각 부문별 1차 후보 목록을 받은 후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간혹 편집부의 후보 외의 도서가 추천되기도 한다. 선정위원들의 의견을 대체로 반영하지만, 최종 선정은 편집부가 결정하는 듯하다...

기고_/CTK_ 2016.12.25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빛과소금〉 2016년 1월호 '미안해, 하지 못한 말' 광장 어디선가 너를 만났으면 좋겠다 열다섯, 혹은 스물아홉 현지에게 내가 목회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스물아홉 신학대학원생이었고, 너는 열다섯 중학생이었다. 나는 청년부와 중등부 담당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고, 너는 나의 제자였다. 교회 청년들과 보냈던 광장의 기억들이 아직도 선연하다. 뜨겁던 6월에는 우리나라에서 펼쳐졌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였고, 찬바람이 불어오던 가을 끝 무렵에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효순, 미선이를 위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을 들면서, 나는 너희들을 생각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미군 제2사단 공병대대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압사당하며 참혹하게 죽었다. 미군은 아이들의 확실..

낭비되고 낭비하여 아름다운, 유혹으로의 초대

낭비되고 낭비하여 아름다운, 유혹으로의 초대 《유혹의 학교》(이서희 지음┃한겨레출판 펴냄┃2016년 5월) 손쉬운 사랑은 없다. 다른 존재를 향한 열망이 발화되는 것은 순간이나 그 존재에 닿을 때까지는 고독의 시간을 앓아야 한다(고독이 소중하다면 그것은 존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심연은 견고하므로, 더욱이 다른 존재라면, 내 고독의 보상을 그에게 쉬이 기대할 수 없다. 천운이 도래하여 열망하던 존재와 연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지금부터의 시간들로 치열하게 증명되어야 하니까. 세상에 손쉬운 사랑은 없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랑도 없다. 포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떤 큰 물살로도 그대의 사랑을 끄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