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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나의 책 나의 저자

Soli_ 2015. 1. 6. 13:03

2014년 나의 책 나의 저자



나의 책들의 자리에, 내 오랜 고독이 있었을 것이다. 고립과 연대의 사이에서 길을 잠시 잃었지만, 굳건한 텍스트들 덕분에 마음이 놓인다. 앞으론 좀더 느리게 읽어야겠다고 다독인다. 그리하여 읽는 만큼 전진하자고 다짐한다. 나의 책들과 나의 저자들에게 최선의 찬사를 보내며. 




 요약 


 

인문/사회/예술 부문 10권의 책


살아가겠다

모멸감

그의 슬픔과 기쁨

복음의 기쁨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뉴스의 시대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정희진처럼 읽기

변증법의 낮잠


문학 부문 10권의 책


불안의 서

소년이 온다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고백의 형식들

어둠 속의 시

끝나지 않은 대화

여자 없는 남자들

눈 먼 자들의 국가

정확한 사랑의 실험

플래너리 오코너


나의 저자


신형철

윤태영





1. 2014년에 출간된 책 중 인문/사회/예술/종교와 문학 부문으로 나누어 각각 10권씩의 책을 선정했습니다. 

2. 사진을 급하게 찍었는데 티가 납니다. 시간이 나면 사진을 다시 찍어야겠어요.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는 책을 잃어버려 사진이 없습니다.ㅜㅜ 

3. 출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인문.사회.예술  10권의 책







≪살아가겠다≫

고병권 지음|삶창 펴냄|2014년 1월

서평_ “희망의 그날은 없다” http://soli0211.tistory.com/510


‘거리의 철학자’ 고병권은 배움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곳, 20년간 장애인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노들야학에서의 강연에서 ‘배움’과 ‘앎’의 단초를 말한다. 장애란 삶의 여러 영역에서 경험하는 어떤 불가능성이다. 어떤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할 수 없음’, 즉 장애를 경험한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무능’과 ‘포기’는 장애의 보편적 정서다. 


“장애인이 장애라는 범주에 완전히 갇혀버리는 것은 ‘무능’을 자기에게 돌리고 그런 자기를 ‘포기’할 때이다.”(95쪽) 


노들야학은 그런 장애에 대한 통념에 도전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우리가 바보가 되는 것은 지능이 모자랄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라고 말했다. ‘배움’과 ‘앎’은 무엇인가. 그것은 ‘포기에 맞서는 것’이다.



≪모멸감≫

김찬호, 유주환 지음|문학과지성사|2014년 3월


감정사회학에 대한 좋은 책이 많이 있지만, 그 중 이 책은 우리 현실에 가장 적확하다는 점에서 발군이다. ‘감정’의 사회학적 지평은 물론, ‘그곳’에서의 역사적 층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입된 감정사회학은 하나의 해석학적 틀은 될 수 있어도, 우리의 민낯을 제대로 구현하기는 어렵다. ‘모멸감’은 오늘의 한국을 사는 이들의 보편적 정서다. 이 땅의 출생률과 자살률은 그것에 대한 유력한 상징이다. 모멸은 존재를 옭맨다. 이 땅에 만연한 모멸의 정서는, 곧잘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발현된다. 공동체는 무너지고 익명이란 찰나의 자유를 얻는 대신 존엄은 고립되고 쇠락한다. 이 책이 뛰어난 또 하나의 이유는, 작곡가 유주환의 음악적 시도다. ‘굴욕과 존엄의 감정’에 대해 김찬호는 텍스트를 썼고, 유주환은 곡을 지어 붙였다. 하여, 이 책엔 ‘3D독법’이 필요하다. 무릇 감정은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의 슬픔과 기쁨≫

정혜윤 지음|후마니타스|2014년 4월

서평_ ‘죽음 자’의 희망 앞에 선 ‘산 자’의 절망 http://soli0211.tistory.com/519


‘슬픔’과 ‘기쁨’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의 일상성은, ‘그’라는 3인칭 단수의 개별성과 만난다. 처음엔 이 책의 제목이 불만이었다. 책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가져서 하는 생각이겠지만, 나라면 제목을 달리 지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을 즈음에야 저자의 의도에 닿을 수 있었다. 인터뷰에 실린 스물여섯의 노동자들은 모두가 ‘일상’을 빼앗긴 자들이었고, 그들의 일상은 각기 다른 ‘개별’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 그리고 해고 후 복직 투쟁을 통해 쟁취하려던 것은 바로 누군가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노동자로서의 지극히 평범하되, 하루하루가 모두 다른 빛깔로 빛나는 일상의 삶이었던 것이다.


해고노동자 문기주는 “내가 자본과 정권에 순종하면서 살면 내 자식들도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순종해도 더 순종해야 하고, 그런 것들 앞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174쪽)라고 묻는다. 양형근은 “진짜 희망은요, 자본주의사회에 살지만 자본주의를 경멸할 줄 아는 거예요”(258쪽)라고 말했다. 그들의 호방한 희망 앞에 오늘 나의 절망이 무참하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희망할 수 있는 오늘이다. 



복음의 기쁨≫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2014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안온한 성전에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의 교회, 아프게 하고(hurting) 더럽혀진 교회가 되자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거스르고 폭력적인 불평등과 빈곤의 구조적 모순에 맞서자고 말한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를 통해서만 실현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에 대한 열망이 복음의 본질이자 기쁨이라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나의 현상으로 소비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것이 두렵다면, 부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에큐메니칼에 대한 첫 번째 감동이 있었으니, 최근 기독교인으로 누린 거의 유일한 위로이자 은혜였다.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안희경 지음|아트북스|2014년 5월


“세상의 안부를 묻는 거장 8인과의 대화”. 이 책의 부제다. 현대미술 8인의 거장은 ‘지금, 여기’의 세계를 성찰하고 평화를 모색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구본준 기자의 추천사에 별로 덧붙일 말이 없다. 


“읽는 내내 놀라웠다.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유명한 이 미술가들을 어떻게 모두 만났을까 먼저 놀랐고, 현대 미술 최고의 스타들이 그녀의 인터뷰 요청에 기꺼이 응한 것에 더욱 놀랐다. 인터뷰는 한 사람의 인생과 직면하는 것. 우주와도 같은 인생을 언어로 끄집어내고 글로 다시 전달하는 인터뷰란 작업은 그 자체로 예술과도 같다. 이 어려운 작업을 해낸 안희경 작가 역시 인터뷰 아티스트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인터뷰가 직업인 사람으로서 그가 얼마나 어렵게 작가들을 섭외하고 얼마나 힘들게 질문을 준비했을지 헤아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수고로움 덕에 우리 시대를 가장 날카롭게 바라보고 가장 뜨겁게 질문을 던지는 예술가들의 육성을 이렇게 한 권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맞다. 놀라운 책이다. 구본준 기자는 맑고 밝은 눈으로 안희경을 ‘인터뷰 아티스트’라고 호명했지만, 나는 그냥 ‘아티스트’로 부르고 싶다. 이 책에 등장하는 거장들의 말보다, 나는 안희경의 모색과 사색이 더 좋았다. 다시 말해, ‘작가 안희경’이 도드라져 좋았던 책이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정문주 옮김|더숲|2014년 6월


마르크스는 실패했지만 와타나베 이타루는 성공했다. 이 책은 <자본론>이 어떻게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감동적인 답변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날선 비평은 이타루를 도시에서 떠나 ‘시골빵집’을 열게 만들었으나, 그다음 그를 인도한 것은 ‘천연균’이다. 시골빵집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다. 천연균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를 고민한 덕분이다. ‘부패하여 순환하는 경제’의 핵심은 발효와 순환, 이윤 남기지 않기, 빵과 사람 키우기로 요약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윤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빵을 굽고 싶다.”(198쪽) 


시골빵집은 자신들의 고집이 ‘자본주의의 대안적 삶’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본디 삶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대안적 삶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 그러하다. ‘생태적 삶’이라는 개념은, 변질되고 오염된 삶의 현실을 보여준다. 삶은 원래 생태적인 것이다. 천연효모의 자리를 대체한 ‘이스트’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유비 같다. 어디 ‘빵’만 그러하겠는가.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갈 길이 아득하지만)감동적인 저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꿔 읽는다(읽고 싶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윤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책을 만들고 싶다.’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지음|최민우 옮김|문학동네|2014년 7월


“뉴스는 팩트다.” 요즘 잘 나가는 ‘황색 저널리즘’ 디스패치의 모토다. 뉴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해석’된 텍스트를 제공할 뿐이다. 해석된(심지어 곡해된) 텍스트를 팩트로 복원하는 일은 시청자의 몫이다. 알랭 드 보통은 정치, 경제, 재난 뉴스에서부터 셀러브리티 소식이나 해외토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뉴스 사용법을 친절히 안내한다. 그리고 불안과 분노, 선정성으로 자극하는 온갖 뉴스를 넘어 결국 타자의 자리에 진심으로 다가서고 있는지를 묻는다. 뉴스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타자의 자리, 말이다(미디어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책으로는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를 권한다. 최고의 책이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오연호 지음|오마이북|2014년 9월


자유, 안정, 평등, 신뢰, 이웃, 환경… ‘행복’에 관한 가슴 뛰는 탐사! 행복지수 1위 국가 덴마크를, 오연호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나라”라고 말한다. 인구 550만의 작은 나라, 불과 150여 년 전에 전쟁으로 참혹한 폐허가 되었던 나라는 어떻게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을까. 재건의 세월을 혹독했으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지도자들은 농업과 교육을 다시 일으켰다. 특히, 그룬트비가 세운 자유학교(호이스콜레)에서 교육받은 시민들이 전국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연대했다. 


“그룬트비는 농민들과 시민들에게 무조건 교육을 강조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농민과 시민이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또 더불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262쪽)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가 핵심이다.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되, 마음껏 욕망하는 것이다. 


“덴마크인들에게 행복인생을 위한 관습법이 있다면 ‘여유를 두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여러 선택지 가운데 살펴보고, 남의 눈치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서 즐겁게 살자’가 제 1조가 될 것이다.”(311쪽) 


‘평등’의 가치와 원칙이 덴마크에서 저토록 힘차게 발휘되는 이유다.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지음|교양인|2014년 10월


다음은 페이스북에 남겼던 단상. 

(1) 여성학자로서의 정희진은 물론, ‘을’이라는 현실의 비참함을 살아가는, 그러나 노동자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는 정희진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유독 반갑다. (2) 로버트 서먼은 평화를 여성의 본성이라고 말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란 전쟁이 억제된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인 정의의 결과라고 말했다. 정희진의 책 읽기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평화의 관점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킨다. (3) 정희진은 망명자이거나 디아스포라적 존재로서 투쟁한다. (4) 그는 어쩌면 지독한 낭만주의자이기도 하겠다. (5) 컨텍스트를 위해 텍스트를 소비하는 어떤 운동가들과는 달리, 정희진은 텍스트, 그 자체를 향한 성실한 탐구자다. (6)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라는 선언과 독서를 “생각하는 노동”이자 “온몸으로 수행하는 수련”으로 정의하는 것을 고려할 때, 정희진의 책과 독서를 기록한 이 책은 ‘정희진을 읽는 가장 유효한 독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7) 이 책이 이렇게 반응이 좋은 것에 놀랐다(부럽다).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 알았다면 출판사는 책의 외모에 좀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아쉽다). 더 놀라운 것은 교양인에서 출간될 정희진의 근간들이다(무려 일곱 권! 무지 부럽다).



변증법의 낮잠

서동진 지음|꾸리에|2014년 10월


모든 존재는 적대적인 것들은 품고 산다.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모순이다. ‘자본주의적 적대’의 오늘은 그 소산이다. 서동진은 브레히트를 인용하며,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세상의 모순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금 비약하자면, 모순이 곧 희망이다. 정치의 역동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오늘날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리는 일은 그래서 시급하다.   


“세계를 모순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227쪽) 


정치란 변증법적 부정의 다른 이름이며, 이제 낮잠 자는 변증법을 깨울 때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읊조리는 가녀린 희망이야말로, 서동진이 분투하듯 사유하는 바로 그것이다. 







 문학  10권의 책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배수아 옮김|봄날의책|2014년 3월


국내 최초의 완역본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배수아의 번역이라서 이 책을 망설임 없이 꼽는다. 배수아의 문체는, 페소아를 만나 절창의 멜랑콜리에 이른다. 페소아는 도시의 이데올로기적 확신을 애도하며, 시간과 운명의 불확실성을 비탄한다. 애도와 비탄의 언어로 읊조리는 불안은 다분히 존재론적이다. 섬세하고도 치열한 슬픔이다. 슬픔으로만 이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책은 지독한 슬픔의 책이라서, 그래서 아름다운 책이다.  페소아의 텍스트 속에 한없이 몰락했던 지난 봄의 여운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창비|2014년 5월


80년 광주에 한 소년과 더불어 파괴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열흘’과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을, 소설은 서늘한 문체로 또박또박 기록한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79쪽)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은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쪽) 


서사를 읽다가 우리는 간혹 그들을 만날 것이다. 파괴된 자의 영혼을, 또는 남겨진 자들의 울음을, 그러면 우리는 걸음을 멈춰 서서 결코 ‘화해하지 않겠다’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2014년 최고의 소설이다.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신동호 지음|실천문학사|2014년 6월


12월 어느 새벽에 읽었던 신동호 시인의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가 지금껏 통증으로 남아 있다. 오래도록 상처로 남을 시집이다. 


“종착역. 끝이 없는 여행은 없다. 없기에 슬프고, 없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혁명은 억지로 봄을 부르지만 겨울아, 왜 사랑은 눈꽃처럼 네 안에서만 피어나는 것이냐.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는 아직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길 끝에 종종 길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겨울 경춘선 2>)라든지, 

“태생적 존재 의식이 방황할 때/삶의 위치가 혁명적으로 변화할 때/생의 근원을 확인하는 경계선이 국경이다/그 국경이 내게는 없다”(<국경>)라는 대목에선 경계인의 숙명과 좌절을 보았으나, 

“걷다, 먼 강둑의 끝. 큰아버지의 등이 따스하던 오토바이 뒷자리, 바람의 한 자락이 귓가를 베고 지나가다. 핏빛. 붉음과 푸름의 차이를 인식하다. 바람의 속도를 경외하다. 강둑을 아주 천천히 걸으며 강의 내면을 들여다보다.”(<幼年의 辭說>)라는 문장에선 디아스포라의 서정에 위로를 얻었고, 

“삶은 자주 단순하다./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또는 양념이 필요치 않다.”(<상천막국수> 부분)라는 문장에선 짐짓 소리 내어 웃었으나, 

“이제 겨우 스무 살 적 받은 광주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났지 싶었는데 너무 아픈 봄을 지났다. 지상의 꿈을 수탈당한 세월호의 아이들과 그 또래들에게 이 시집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시인의 말’엔 끝내 울고 말았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윤옥 옮김|문학동네|2014년 8월


‘여자 없는 남자들’의 연작 여섯 편과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독특한 오마주 ‘사랑하는 남자’가 담겼다. 사랑하는 여자가 갑자기 사라지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우주에서 길을 잃어버린 미아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만, 소리 내어 울기보단,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고 문을 닫아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남자가 미아와 다른 점.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토로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정확히 알 것 같다. 나는 하루키의 장편보단 단편을 훨씬 좋아한다는 것을. 





≪고백의 형식들≫≪어둠 속의 시≫≪끝나지 않은 대화≫

이성복 지음|열화당|2014년 9월


1976년부터 2014년 사이에 쓰여진 산문집, 1976년부터 1985년 사이에 쓰여진 미간행 시집, 1986년부터 2014년 사이에 이루어진 대담집. ‘시인 이성복의 역사’를 반추하고 아우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특권인가. 





≪눈 먼 자들의 국가≫

박민규 외 지음|문학동네|2014년 10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김애란, 김행숙, 김연수, 박민규, 진은영, 황정은, 배명훈, 황종연, 김홍중, 전규찬, 김서영, 홍철기 작가의 기록이다. 이 작은책을 엮은 신형철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박민규의 글도 힘주어 말하고 있지만, 나는 서사론 강의의 도입부에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좋은 이야기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을 다룬다. 사고는 ‘사실’과 관계하는, ‘처리’와 ‘복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건은 ‘진실’과 관계하는, ‘대면’과 ‘응답’의 대상이다. 사건이 정말 사건이라면 그것은 진실을 산출한다. 진실이 정말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 진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때 해야 할 일은 그 진실에 대면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일이다.”(229쪽)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한 슬픔은 합당한 이유 없이 눈물을 그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제 이 책은 세상으로 나아간다.”(231쪽) 


진실은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한 슬픔은 눈물을 그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안톤 체호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의 역할은 상황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가 더 이상 그 상황을 피해갈 수 없도록.” 문학의 본령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마음산책|2014년 10월


2014년에 읽었던 책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이다(이 책의 물성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영화평론이 아닌, 영화의 서사에 대한 문학평론가의 질문이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이냐고, 그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밀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 질문은 결국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 곧 사랑이다. 정확한 문장이 아름다움마저 획득하면, 독자로선 할 말을 잃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옮겨 적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25쪽)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27쪽)

“조물주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을 만들어 넣은 것은 인간이 계속 살아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는 인간의 삶이 그 욕망과 더불어 장차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미리 계산하지 못했거나 안 한 것 같다. 그 계산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99쪽)

주석’은 최대한의 정확성을, ‘해석’은 최대한의 단독성을, ‘배치’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118쪽)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132-133쪽)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비평가일지도 모른다.”(202쪽)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214쪽)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고정아 옮김|마음산책|2014년 10월


39살의 나이에 작고한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를 굳이 기독교 작가로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모든 빛나는 문학의 성취는 ‘순전한 기독교’의 진리와 공명한다고 믿는다. 특히, 오코너의 문학은 더욱 직설적으로 그것을 성취한다. 오코너는 무력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주목한다. 그러나 값싼 동정은 사양한다. 적절한 거리감이 확보된 작가의 시선은, 보잘것없는 그들 삶에서 발휘되는 적절한 위트를, 작고 소소한 감동을, 빛나는 경이를 포착해 낸다. 오코너의 첫 번째 번역본이 현대문학과 문학수첩에서 출간되었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리고 2014년,  나의 저자 





ⓒ문학동네


신형

2008년, 2011년, 2014년, ‘나의 저자’는 신형철이었다. 

그가 책을 낸 해는, 어김없이 신형철의 해로 기억되었던 것이다.  





태영

내가 만든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는 것은 반칙이다. 그러나 이번엔 반칙을 해야겠다. 2009년 5월 23일은, ‘남자어른’이 된 이후 두 번째로 많이 울었던 날이다. 윤태영의 책을 두 권 만들면서, 간혹,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지만, 그의 사람들은 불편하고 별로다. 윤태영은 달랐다. 그래서 그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이 썼다. “윤태영의 모습에는 순결한 결기를 가졌던 노무현 대통령의 면모가 투영되고 있다”고. 덕분에 행복했던, 그래서 고마운 나의 저자다.